이방인이 아닌 이민자로
직원이 밴쿠버 시내에서 비어있는 가게 하나를 찾아왔다. 식당들을 상대로 음식거리를 납품하고 있었던 아버지가 소매 고객들을 상대로 야채가게를 열고 싶어 하던 딱 그 시기였다.
몇 번의 미팅 끝에 계약을 하기로 결정하고 수도 없는 요구, 조정, 의논 끝에 계약이 성사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늦어짐을 염려한 아버지는 나에게 냉장시설을 맡긴 인도 사장과의 대화를 재촉했다.
인도 사장은 내게 말했다. 너희 아버지가 돈이 없다며 며칠을 끌었던 것 때문에 일의 진행이 늦어진 것이라고.
냉장시설을 새로 구매하고 설치하기까지에 필요한 돈을 준비해야 했던 아버지의 상황이 마치 죄, 인 것처럼, 그 죄, 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불평 없이 그저 그의 일처리를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는 매우 당당했다.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 우리는 죄인이 되어버렸다.
가족이 이민을 온 것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나고 난 9월이었다. 사업이민이었기에 부모님은 밴쿠버에서 일식집 가게를 운영하기로 결정했고, 장사가 되든 안되든 정해진 시간 동안은 가게 운영을 했어야만 했다. 영주권이 확정되고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가게는 거의 버려지다시피 정리되었다. 부모님은 다른 사람들의 사업장에서 파트타임 혹은 풀타임으로 일을 하셨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가족의 경제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살면 된다고만 생각했다.
미국으로 대학을 가고 휴학을 하고 다시 복학을 하는 동안에 아버지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진행하셨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업의 규모는 조금씩 커져갔고 이런저런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졸업 후 밴쿠버로 돌아와서 부모님의 일을 두 달 정도 돕다가 다른 회사에 취직을 했다. 직장생활을 하며 부모님의 바쁜 일상과는 철저히 분리된 삶을 살다가 가게를 여는 일에 개입되어 올해 초 잠시 그 일을 돕게 되었다.
하나의 가게를 얼기까지 엄청나게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시청에서 받아야 하는 퍼밋, 건물주와 결정해야 하는 사항들, 물건을 구매하고 보관하고 관리하는 것 하나하나까지도 다 정해진 법칙대로 움직여야 한다. 길바닥에 고무대야 몇 개 놓고, 비닐에 나물 담아주며, 지폐 몇 장과 동전 몇 개로 거래를 하던 시장의 감성은 이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부엌 안에 있는 조명 가리개 하나를 맞춤 제작하기 위해 스무 군데가 넘는 조명회사에 전화를 하고, 유리창에 붙일 반투명 홍보사진을 인쇄하기 위해 인쇄소와 사이즈당 가격을 두고 협상을 했다. 시청 담당자와 열 번이 넘는 통화, 이메일, 방문은 그 숱한 불편함을 감수했음 해도 라이선스를 받을 수 없었고, 또 다른 기관에서 보내온 감사원과는 세 번이나 만나 같은 공간을 둘러보며 사업자등록을 위한 준비물을 체크하고 또 체크했다. 직원을 뽑기 위해 구인구직 웹사이트에 글을 올리고, 인터뷰를 했지만 어렵게 구한 직원이 못하겠다는 통보를 해올 때면 다시 그 웹사이트에 들어가 새로운 글을 올려야만 했다.
가게를 열고나니 다른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싱싱한 야채와 과일을 판매해야 하는 일이기에 매번 찬물에 손을 담가서 잎 야채들을 단장하고, 과일은 조금이라도 썩을 기미가 보이면 다른 곳에 따로 모아 두고 누군가가 처리해야 했다. 오랜 시간 빈자리였던 그곳에 다시 단골을 만드는 일. 한국의 김치와 반찬들을 소개하는 일. 일, 일 그리고 또 일. 매일이 일의 연속성 속에 지나갔다.
엊그제는 가게 뒷문에 있는 세 개의 냉장시설 중 두 개가 작동하지 않아서 난리가 나고, 그 전주 주말에는 오프닝을 하는 직원에게 가게 부엌의 열쇠가 없어서 한소동이 벌어졌다. 아무리 챙긴다고 챙겨도 구멍이 나고야 만다.
게다가 가게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원들에게 영어는 제2외국어였다. 일이 급할수록 스피킹은 자신 없어지고, 리스닝은 형편없어졌다. 여유가 있어도 될까 말까 한데, 일이 안 좋을 쪽으로 흘러갈 때면 늘 입이 말썽이고 귀가 말을 듣지 않았다. 일을 처리하기 위해 소통해야 하는 사람들도 이민자들이 대다수였다. 대화를 하고 나도 정확히 서로가 서로를 이해한 게 맞은 걸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심히 한다고 하는 모든 행동들이 '죄'인 것처럼 치부될 때, 영어가 '외국어'라는 사실이 일의 진행속도를 늦추는 것 같을 때, 일을 처리하는 내가 캐나다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처럼 느껴질 때, 나는 기억하려고 한다. 나의 이해를 넘어선 훨씬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이민을 해왔고, 많은 일을 했고, 많은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을. 노력은 절대 '죄'가 아니고, 끝없는 도전은 어떤 속도라도 지속되어야만 하며, 나는 '이방인'이 아닌 '이민자'라는 사실을.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 또 기회가 주어진다면 가게 하나쯤이야 지금이라도 당장 열 수 있을 것 같다고. 지금 내가 하는 일과 내가 구상하는 프로젝트들에는 어울리지 않는 경험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언젠가 내가 해온 모든 것들이 더 큰 일을 이룰 것임을 믿는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국가와 도시로 이민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디딘 모든 이민자들에게 끝없는 응원과 진심 어린 존경을 보낸다. 절대 포기하지 않기를. 이방인이 아님 당당한 이민자로 살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