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싶은 욕망? 혹은 그때마다 나를 살려준 경험?
엄마라는 발화. 끊고 싶지 않은 소리. 부르면 속으로부터 옅고도 무거운 젖냄새가 나는 것도 같습니다. 엄마 라고 불렀을 때, 엄마아… 길게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가는, 입을 벌리고 내는 숨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는 살고 싶어서 엄마를 부릅니다. 엄마 없이도 살만큼 충분히 컸을 때에도, 내 삶을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은 위기를 감지한 순간에, 삶을 이어가고 싶은 욕망이 엄마를 부르게 합니다.
내가 살고 싶은 욕망이 ‘엄마’일까요? 혹은 그때마다 나를 살려준 경험이 ‘엄마’일까요?
삶을 지속하려던 욕망이었던 엄마라는 단어가, 내가 부르는 타자를 향한 말이 아니라, 작은 존재의 생존을 책임지어야 하는, 나를 부르고 내가 되어야 하는 말이 되었을 때. 그 순간의 변화의 느낌을 무어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한참 쏟아지는 모래시계를 거꾸로 세우는 순간, 거세게 들이치는 파도가 우뚝하게 각진 바위를 만나 하늘로 솟구쳐올라 갈 때, 떨어지는 폭포 앞에서도 거꾸로 올라가야 하는 연어의 절박한 파닥임.
역전과도 같은 급변, 충격. 누군가는 짧고 강한 감동으로 다가왔다가 길고 긴 낮은 우울로 끌고 가기도 하고, 요란한 축하 속에 얼떨떨하다 멍해지기도 합니다.
중학교 때였던 것 같습니다. 20세기말, 9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분들이라면 공감할 것 같습니다. 학교란 배움이라는 품위보다는 망말과 폭력으로 얼룩진 곳이었다는 것, 국사 시간에 선생님이 일제시대를 가르치는 시간이었습니다. 여자 아이들만 있는 반이기에 모성에 은밀한 폭력을 가하고, 모성이 줄 수 있는 쓴 배반감을 보여주고 싶어서 였을까요? 예전 일본의 707부대에서는 그런 실험을 했다고도 합니다. 아이와 엄마를 물 속에 빠뜨려, 엄마의 반응을 보는 실험이요.
잔혹한 이야기는 오래 잔상에 남습니다. 제게도 그러했습니다. 이제 아이들을 키운 지 십년 입니다. 지난 십년 동안 나는 물 속에서 허우적대며, 아이들이 물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발버둥쳤던 것 같아요.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겠습니다. 우둔하고 지혜 없는 저에게는 그 시간이 10년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무사히 땅으로 올리고 이제서야 젖은 몸과 발로 흙을 밟는 느낌이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