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 끝장 서울살이 생존일지
서울에서 알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직장에서 만났다. 인맥 쌓기에 재능도 관심도 없는 나는 일터 밖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확실한 장단점이 있었는데 좋은 사람들과 일할 때는 모두가 잠재적 친구로 보였고 인류애가 생겼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출구 없는 생지옥이 따로 없다.
불시에 어디서 미사일이 날아올지 몰라 긴장감이 넘치던 일터를 다닐 때는 직원들이 각자의 방공호를 지어 그 안에 숨어서 일했는데 사람에 대한 신뢰는 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적이란 걸 깨달았다. 리더가 바뀌고, 새로운 직원이 입사해도 방공호를 허무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신형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해관계가 맞는 사람끼리 동맹을 맺었다.
하루는 동료에게 물어봤다.
"왜 그렇게 높은 방어벽을 세웠어요?"
"이것도 부족해요. 사드를 살 수 있다면 설치하고 싶네요." (*사드는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를 뜻한다)
불신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고, 난세에 나타나는 영웅도 없었다. 나는 정신건강이 염려되어 직장에 대한 관심을 없애려고 스위치 off를 시도했고 취미활동도 시작했다. 연극 동호회에서 30명의 친구들이 생겼고 시시각각 번개를 치며 바쁜 나날들을 보냈 수 있었다. 홍수처럼 밀려드는 약속들은 내가 직장생활의 괴로움을 잊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00 씨! 들려요?"
회의 시간에 내 이름을 불러도 나는 들을 수 없는 경지까지 올랐다. 내가 원한 것 이상으로 심한 스위치 off 상태가 된 것이다.
일터가 전부일 때는 직장 동료들과 퇴근 후까지 회사 얘기를 하는 것이 재밌었지만, 흥미를 잃어버린 후에 다시 관심을 갖기 어려웠다. 나는 회사 밖 친구들과의 아무말대잔치가 더 즐거웠다. 하지만 하루 걸러 하루 술을 마시는 것에도 한계가 왔다. 그렇게 일 년 간의 취미활동을 마무리하고, 여한 없이 직장도 정리했다.
사드가 필요했던 직장에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회사 밖 친구들과 종종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다. 남자사람-친구인 K는 유머러스한 젠틀남이고, 여자사람-친구인 J는 스마트한 욜로다. 취하기 전까지 말이다. 나도 취하기 전까지는 귀요미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우리는 만나서 항상 술을 마신다.
K : 한잔 더 안 해?
J : 2차 콜! 가자 가자.
나 : 나 취했어. 집에 가야 돼. 힘들어.
J : 한잔만 더 하자. 응? 딱 한잔만.
나 : 너 내일 상견례 있다며! 정신 차려!
하루는 J와 내가 옥신각신 서로 고집을 부리다 결국 길거리에서 넘어졌다. 백팩을 메고 있던 나는 가방의 엠보싱 작용으로 충격이 덜 했지만, J는 얼굴을 시멘트 바닥에 갈았다. 우리는 취했으므로 아픔도 부끄러움도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생존 욕구를 느껴 택시를 탔다. 인사불성이던 J는 핸드폰이 울리자 자세를 고쳐 앉아 발신자명을 확인했다. 누구와도 통화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았지만 예상과 달리 J는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남자친구와 통화했다.
나 : K야. 너는 여친이 걱정 안 해?
K : 말로는 재밌게 놀고 오라고 하는데, 하겠지.
나 : 전화는 안 와?
K : 그전에 카톡 보내지.
나 : 담에는 그냥 같이 보자고 해. 넷이 보면 좋잖아.
K : 기겁한다. J 얼굴에 스크래치 봐라.
나 : 맞네.
J, K, 나 : ㅋㅋㅋㅋ
나이가 들수록 서로의 망가짐을 이해받기 어렵다. 노래방에서 나밖에 모르는 노래를 불러도, 음정 박자를 다 틀려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과 시시콜콜한, 결론 없는, 아무말대잔치가 가끔은 필요하다.
일은 너무나 소중하지만, 그것이 나를 둘러싼 전부가 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