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은 영원하다

최강 끝장 서울살이 생존일지

by intojeong
서울에는 다양한 종족이 살고 있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거울 삼아 나의 좌표가 본투비 낭만족임을 알게 됐다. 서울이기에 가능했던 각각의 캐릭터 교차는 언제나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여자 다섯이 춘천으로 떠났다.


여자 1. M은 무리의 리더이자 왕언니다

여자 2. 효블 나다. 낭만족이다

여자 3. J는 욜로족이다

여자 4. Y는 천상여자다

여자 5. C는 걸크러쉬다


무더위가 엄습하던 어느 날 왕언니 M은 춘천으로 가자고 했다. 리조트 무료 숙박권이 있으니 1박을 해야 하며, 여름이니 수상레저를 했다가 현지인만 가는 찐맛집에 가서 저녁을 먹자고 했다. M의 미친 추진력과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제안에 나는 옷장을 다 뒤져 수영복을 찾아냈다. M의 픽업 차량을 놓칠 새라 우리는 짐가방을 챙겨 늦지 않게 픽업 장소인 강남역으로 착착 모였다.


약속 시간이 되자, 멀리서 M의 은빛 벤츠가 나타났다. M은 드라마 속 므흣한 실장님들처럼 차에 타라며 손짓했다. 나는 보조석에 앉아 의자를 앞으로 당기려고 레버를 찾았다. 하지만 의자 밑에도, 옆에도 손에 잡히는 레버는 없었다. 나의 두리번을 눈치챈 M은 보조석 창문 밑에 볼록하게 나와있는 버튼을 몇 번 만지더니 나를 원하는 위치로 옮겨놨다. 자동 시트조절이라니!


우리의 일정은 이랬다.

- 12:00 춘천 숯불 닭갈비로 배를 두둑이 채운다.

- 14:00 수상레저를 즐긴다.

- 18:00 숙소 체크인

- 18:30 현지인만 간다는 미친 맛집에 간다.

- 21:00 숙소로 돌아와 한 잔 적신다.

- 08:00 숙소 체크아웃


우리는 연극 동호회에서 만나 친해졌고 춘천행은 일사천리로 성사됐다. 서울로 돌아오는 이튿날은 연극 수업이 있는 날이라 늦지 않도록 일정을 세웠다. 공연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연습을 빠지면 그거 참 눈총 맞기 딱 좋은 그런 날이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춘천에 도착해서 점심으로 숯불 닭갈비를 먹고 , M이 즐겨 찾는다는 빠지로 갔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강물 위로 보트가 지나가면서 하얗게 갈라지는 물길이 여기저기 보였다. 곧 있으면 마주할 내 모습 같아 활주하는 그들을 보며 마음이 일렁거렸다.


강사님의 안내에 따라 수상스키 타는 자세를 배운 뒤, 모터보트에 몸을 실었다. 참으로 흥분되는 출격이었다. 나는 물에 입수하여 보트에 달린 밧줄을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보트가 출발하면 급격히 강해지는 물살을 버티고 수면 위로 일어서기 위해 두 다리에 힘을 줬다. 육지 스키 좀 탄다고 자부하던 나였으니 걱정 없었다. 하지만 수십 번을 도전해도 나와 보트를 연결한 밧줄은 3초 이상 팽팽해지지 않았다.


무리 중 수면 위를 활주 한 이는 M과 뜻밖에도 천상여자 Y였다. 나머지는 보트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육지로 올라올 힘도 없어서 근처에 계시던 사장님이 건져줬다. 이와중에도 J는 욜로답게 행복해 보이는 사진 수십 장을 남겼다.


물놀이를 마치고 만신창이 몸으로 숙소를 체크인했을 때, M은 저녁을 먹으려면 10분 뒤에 바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안 그러면 자리가 없어 먹기 힘들 거라 했다. 우리는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였기에 샤워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M은 본업인 프로 강사답게 우리가 단체 샤워를 하면, 10분 안에 나갈 채비를 마칠 수 있음을 설명했다.

"된다고 생각해. 된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해. 된다. 된다. 된다고 생각해."

가능성이 낮은 일에 애쓰지 않는 나였지만 M의 카리스마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고, 단체 샤워를 게임에 도전하듯 하게 했다. 비록 10분을 넘겨 숙소를 나왔지만 재미있었다. M이 어떻게 강남에서 프로 강사가 되었는지 알 거 같았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맥주로 몸을 충분히 적셨지만 이대로 하루를 마감하기 아쉬워 숙소에서 한잔 더 적셨다. 걸크러쉬 C의 포스는 동생이라 다행이라고 느끼게 하는 면이 있었는데, 요청하면 언제나 우리의 주크박스가 되어주는 반전 매력도 있었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음정 하나 틀리지 않는 C였다. 천상여자 Y는 맥주 한 잔에 기절했고, 취해서도 여신미를 뽐내며 곱게 잠들었다. 욜로인 J는 왜소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소주 4병을 마시는 모임에 C와 함께 가입해 있었는데 숙소에서도 얼마나 마셨는지 잠드는 순간까지 웃고 있었다. 그렇게 각자의 스타일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울어대는 알람 소리에도 모두 움직이지 못했다. 전날의 격렬한 물놀이와 타이트한 일정은 눈에 다크서클을 선사했다. 우리는 가까스로 아침 8:20분에 체크아웃했다. 연극 수업에는 이미 지각이었지만 최대한 서둘러 가기로 했다.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M이 말했다.

"여기 되게 유명한 손두부 정식집이 있어. 정말 먹어본 손두부 중에 최고야. 아쉽다. 너희한테 정말 소개해주고 싶은 그런 집인데.. 정말 일품 맛집인데.."


연극 수업에 늦어 걱정하는 나에게 J가 말했다.

"효블, 우리 M이 말하는 손두부 정식집 가서 아침 먹고 서울 가면 안 돼?"


나도 낭만 좀 아는 사람이지만 약속 시간에 늦어서 초조해하며 식사하긴 싫었다.

"안 그래도 늦었잖아. 반장한테 눈치 보여. 뭐라고 말해?"

나는 아무런 리액션 없는 Y와 C의 표정을 살폈다. Y와 C는 언니들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듯 창밖을 응시했다. M이 다시 입을 뗐다.

"이제 곧 톨게이트야. 5분 안에 결정해줘."


J는 웃으며 말했다.

"효블, 눈치는 잠시지만 맛은 영원해."


나는 지금도 그 말을 잊지 못한다.

그 손두부 맛도 잊지 못한다.



주변을 보면 직장 내에 유급의 생리휴가가 있어도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취지에 맞게 사용하려 해도 눈치가 보여 말 꺼내기를 망설인다. 눈치는 잠시지만 생리휴가는 하루 종일 달콤하다.

상사가 가욋일을 시켰을 때 거절하기 몹시나 눈치 보인다. 하지만 잊지 말자. 거절은 잠시지만 가욋일은 계속된다.

나는 전생에 무수리였는지 참 이래저래 눈치를 많이 봤다. 눈치를 본다고 기특해서 챙겨주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이제는 안다. 31가지 아이스크림 맛 중에 무슨 맛을 원하는지 고르듯이 선택해야 한다는 걸. 맛은 영원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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