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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tojeong Jun 11. 2019

영화 <기생충>

그 집에는 누가 사는가?

영화 <기생충>은 봉준호 감독의 전작인 <설국열차>의 현대판이라 해도 무방해 보인다. 기상이변으로 빙하기가 시작되고 생존을 위해 설국열차에 올라탄 사람들은 재산, 지위, 기능에 따라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가까스로 설국열차에 무임승차한 사람들은 꼬리칸에 갇혀 통제받고, 앞쪽칸으로부터 식량을 배식 받아 생활한다. 연중무휴 내달리는 설국열차는 자본주의 시스템이고, 그 안의 열차칸은 돈을 지불해야 가질 수 있는 집과 같다. 그러니 기생충을 보는 내내 설국열차가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기생충을 보고 난 뒤의 여운이 훨씬 압도적이었다.


왜 무엇이 이토록 긴 여운과 씁쓸한 뒷맛을 남겼는지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 집에는 누가 사는가?


서울에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를 보며 한번쯤 생각한다. 아파트는 저렇게나 많은데 나는 왜 가질 수 없을까? 우리나라 주택보급률은 100%가 넘었다는데, 전월세 세입자는 왜 이렇게 많을까? 과연 이번 생에는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질문들의 답을 알고 있다.

 

영화 <기생충> 기택의 집

영화는 주인공 가족들이 어떻게 해서 그 집에 살고 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집집마다 누군가가 살고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감독은 우리가 흔히 보는 다양한 집의 형태 중 가장 극명한 대조를 느끼게 할 두 집을 선택해서 보여준다. 반지하 집과 단독주택이다. 하나는 시각적 굴욕을 주고, 다른 하나는 시각적 우월을 주는 집이다.


부촌에 위치한 박사장(이선균)의 단독주택은 앞 집이 전망을 가로막는 일이 없도록 경사면에 지어졌고, 탁 트힌 전망을 가짐으로써 사회적 우위만큼 시각적 우위도 갖게 한다. 하지만 기택(송강호)이 사는 반지하 집은 바깥 사람들을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게 하고, 밤마다 취객의 오물을 걱정하며 살게 한다.


갑작스런 폭우로 집이 잠겨 기택의 가족이 인근 체육관으로 대피하고, 아들과 나란히 누워 대화하는 장면은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계획이 잘못돼서 가난해진 것인가, 가난하게 태어나서 계획이 잘못된 것인가?


필자는 봉준호 감독이 영화 전반을 통해 후자를 말한다고 봤다. 흔히 한국사회를 미끄럼틀 사회로 표현한다. 한번 미끄러져 내려가면 가속도가 붙어서 한없이 내려간다. 그러나 다시 올라오기는 너무나 힘들다. 기택은 처음부터 무기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좌절을 맛 보았을 것이고, 그로인해 삶이 더 곤궁해졌을 것이다. 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더욱 그렇게 느끼게 했다.


영화 <기생충> 박사장의 집


반면, 박사장의 단독주택은 전쟁이 터져도 숨어   있게 지어진 방공호가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박사장은 끝내 방공호의 존재조차 모른다. 대신에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숨어 산다.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숨겨야 하는 존재이기에, 반지하 집보다  어둡고 열악한 지하로 내려가 산다.


그렇게 모두가 선망하는 박사장의 집은 음침하고 기괴한 지하 방공호까지 이어져 있다. 이러한 섬뜩한 기생은 박사장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봐도 그렇다. 의자앉기 게임처럼 플레이어 수보다 적은 수의 의자에 앉기 위해 기택의 가족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미 앉아 있는 사람들의 의자를 빼앗는다. 그렇게 게임의 룰을 어겨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심플하고 착한 집주인을 모시며 하루하루 만족해할 뿐이다.


우리는 이 영화의 엔딩을 보고 난 뒤 충격과 씁쓸함을 느낀다. 더 이상 앞 장면을 떠올리며 웃을 수도 없게 된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을 통해 선사한 결말은 '누군가 지하 방공호를 또 채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 부자가 되겠다고 계획을 세우는 기택의 아들(최우식)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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