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씨는 어두운 땅속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신이시여, 제발 수박이 되게 해주세요."
수박씨는 자신을 짓누르는 흙더미를 밀어내기 위해 다시 한번 안간힘을 써보았다. 하지만 제자리였다. 흙더미는 일말의 들썩임도 없었다. 수박씨는 자신보다 수천 배, 아니 수만 배 무거운 흙더미를 들어 올리기 위해 계속해서 꿈틀거렸다.
수박씨는 땅 위를 기어 다니며 줄기를 늘어뜨리고 화관을 열어젖히는 순간을 매일 꿈꾸었다. 어둡고 눅눅한 땅속에서 벗어나, 지상에 사는 다른 수박들처럼 커다랗고 화려한 몸집과 줄무늬를 세상에 드러내고 싶었다. 그것이 수박씨에게는 본능이자 꿈이었다. 그러나 꿈이 이루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수박씨는 초조하고 두려웠다.
"신이시여, 저는 수박이 되리라 믿습니다. 저는 수박이 되는 것 말고는 다른 존재의미가 없습니다. 제발 하루빨리 수박이 되게 해주세요."
며칠이 지난 깊은 밤이었다.
'이곳에 나는 심어진 것인가 버려진 것인가..'
수박씨는 추위에 몸을 떨며 자기연민에 빠져들었다. 수박씨가 묻혀있는 땅은 그늘져서 한여름 정오에도 햇볕이 잘 들지않아 저온 다습했다. 수박으로 생육하기 척박한 곳이었다.
'나도 수박이 될 수 있을까? 도대체 수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난 내가 씨앗이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평생 수박이 못되고 끝나버릴지도 몰라'
수박씨는 수박이 되기까지 얼마나 더 몸을 떨어야 하고, 머리 아파해야 할지 생각하자 울적해졌다. 그런 걸 고민하다 보니 수박이 별로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어차피 수박이 안될지도 모르는데 그만하고 싶어'
수박씨는 울면서 잠드는 날이 많아졌다. 모두가 딛고 서는 땅이 짓누르고 있어서 수박씨는 일어날 수 없었다.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모를 만큼 멀리 떨어진 사람들도, 영원히 만나지 못할 사람들도 모두 딛고 서있는 그런 큰 땅이 수박씨를 누르고 있었다.
"선택은 쉬운 게 아니지. 그래서 선택은 안 하는 게 좋지. 움직이지 마. 그럼 변하는 게 없을 테니까."
울고 있던 수박씨는 낯선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뭐라고?"
"모르겠으면 가만히 있으란 말이야!"
수박씨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숨죽여 흐느낄 뿐이었다.
이튿날이 되었다. 날이 밝고 땅속에 온기가 감돌았다. 이게 얼마 만에 퍼지는 온기인가? 깊은 토심의 흙알갱이까지 온기가 전해지는 강렬한 햇볕이었다. 하지만 수박씨는 밤새 흘린 눈물 때문에 주위의 흙이 마르지 않았다. 수박씨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것은 수박씨가 움틀 수 있었던 마지막 햇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