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에 헬스 PT 결제라니

오늘도 망했다_청빈하고 싶은 소비일지

by 써드

운동화 85,000원


옷장에 옷이 많아도 입는 옷만 입게 되는 현상은 신발에도 똑같이 일어난다. 검은색 스케처스 운동화는 어느 순간부터 무엇을 입든 고정 패션이 되고 말았는데, 물건의 기억이란 신을 때마다 운동화를 사준 옛 연인을 떠올리게 하니 여간 마음이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하필이면 이별하기 직전 무렵에 사준 선물이라, 이것 외에도 불가리 향수가 하나 더 있는데 둘 다 버리지도 못하고 애용하게 되는 골칫덩이 물품이다. ‘이걸 사줄 때쯤엔 나를 아예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으려나?’ 속절없이 가늠하게 되는 일도 잦다. 하지만 다른 신발을 신자니 반스 단화 같은 경우 신는 순간이 귀찮고 번거롭기도 하고, 너무 맨발로 걷는 느낌이라 손이 잘 가지 않는다. 별다른 대안이 될 만한 데일리 아이템도 없다. 그래서 운동화를 사러 가기로 마음 먹었다.

옛 사람은 언젠가 나에게 ‘넌 뉴발란스보다는 나이키가 더 어울려’라고 했는데, 그 말에 대한 소심한 반항이라도 하듯 뉴발란스 운동화를 살 수 있는 곳에 가서 가장 먼저 뉴발란스 제품을 살펴보기로 했다. 내가 운동화를 고르는 기준은 때가 잘 타지 않고 편안하기만 하면 되는지라 할인폭이 가장 큰 검은 기본스타일로 골랐다. 제법 단단히 발목을 지탱해주는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불가피한 목돈 지출이라 마음이 무거웠다. 신을 건 신고, 입을 건 입고, 먹을 건 먹으려면 돈이 모이는 건 고사하고 그만큼만이라도 벌어야 하는데. 내 월급으로는 다 헤어지고 낡은 검은색 스케쳐스를 마르고 닳도록 신어야 하거늘. 그러니 카드값이 엇박으로 치고 들어오면 어쩔 수 없이 과중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새벽에 나서야 하는 일상이 펼쳐진다. 편하게 걷고 열심히 일한다. 일, 일, 일.


치킨 25,000원과 결합한 헬스 PT 10회권 600,000원


새벽에 깨는 일이 잦다. 그만큼 일찍 자기 때문이다. 밤이 주는 충동과 과잉을 피하려고 일찍 잠들게 된 것치고 오늘 새벽은 퍽이나 파격적인 시간이었다. 갑자기 속이 허해지며 치킨을 먹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피어오른 것이다. 시작은 24시 분식점에서 닭꼬치라도 좀 시켜 먹을까 하고 출발했는데 그곳의 최소결제기준을 맞추려면 프렌치토스트도 시켜야 한다는 핑계가 만들어지고 한참을 누워서 프렌치토스트를 먹는 나를 상상했다. 아주 사악한 음식이다. 계란물을 입히고 설탕물도 바르고 하다 보면 음으로 양으로 뱃살 직행권이 무수히 발급되겠지. 그러니 마땅히 폰을 덮고 오지 않는 잠을 더 청했어야 했는데, 어쩐 일인지 사고의 흐름이 ‘그럼 아예 치킨을 시켜서 먹으면 좀 낫지 않을까’로 흘렀다.

결제 버튼을 누르고 나니 망가진 식생활의 파도가 나를 온통 헤집어놓은 것 같은 기분에 반사적으로 한동안 쉬었던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경제활동에서 ‘이것만큼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항목 중에 가장 꼴찌가 운동이었는데, 이제는 운동을 최상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엄중한 생각마저 들었다. 집에서 가까운 프랜차이즈 헬스장에 PT 10회권 결제를 하고 10분이 채 안 되어 내가 선택한 트레이너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일체의 상담도 없이 무작정 결제를 한 내가 황당했던 모양이다. 때마침 치킨이 집에 도착해 테이블 위에 뜯지 않은 치킨을 올려두고 트레이너와 잠시 통화를 했다.


“제가 지금 치킨을 시켰는데요. 그래서 PT 신청을 했어요.”


트레이너는 수화기 너머로 한참을 웃었다. 그렇다. 몸의 밸런스가 무너지려 하는 응급 상황이니 그럴 때는 마땅히 구급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누군가 나를 기다리지 않으면 좀처럼 헬스장엘 가지 않는 나를 잘 알기에, 이 기구 저 기구 누구 한 사람이라도 앉아 있으면, 엄두도 못 내고 간신히 러닝머신 위에서 걷다 오는 나를 잘 알기에 헬스 PT는 최전방에서 나를 지켜줄 수 있는 비싼 보호막이다. 트레이너와 약속을 잡고 통화를 마친 뒤 이제 기존 술자리 횟수에서 10회를 줄이거나 새벽에 치킨을 시키고 싶은 마음을 30번 참는 등, 다른 영역의 허리띠를 졸라매면 되겠지 하는 막연하고 안일한 생각이 뒤따랐다. 하지만 지켜야 한다.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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