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망했다_청빈하고 싶은 소비일지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고 했는데, 어제 나는 대체로 입을 닫지 않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라도 하듯, 술자리 중반에 ‘1차는 내가 계산하겠다’는, 내 통장이 미어지는 망언을 내뱉었다. 회사 동료라고 하기엔 다들 푸릇한 2030에 걸친 4인과 참 어울리지 않는 나 하나로 구성된 모임이었다.
작년 말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싹둑 잘려나가고 올 한 해 그래도 회사 내 젊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어서 좋았는데, 언젠가부터 이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 더치페이를 하는 일이 어쩐지 민망해졌다. 그리하여 1차를 계산하는 객기는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번엔 얼마였지? 그래도 15만원을 넘지는 않았었는데, 이번에는 메뉴도 호사스러운 육회 단골집에 가는 바람에 순식간에 술값이 불어나버렸다. 기분 좋게 냈지만 대참사는 대참사다. 마땅히 17만원이 찍힌 영수증의 의의를 짚어봐야 할 터.
1) 네버랜드 졸업의 의미
기본적으로 나는 동생들이 편하다. 회사만 놓고 본다면 술을 즐기는 동년배 친구들도 꽤 있다. 하지만 그들과 선뜻 모임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내 나이쯤 되면 다들 집에 코흘리개 아이나 남편, 또는 아내가 있고, 그마저 없는 경우는 다들 본인의 커리어를 디벨롭(이런 표현은 참 싫지만)하기 바쁘다. 한마디로 가정에 묶여 있거나 일에 자발적으로 자신을 묶어놓았다. 그 사이에서 나는 ‘그렇게 바쁘게 살면 돈이 나오냐 뭐가 나오냐?’ 하고 생각하면서 동료들이 야심을 키운 끝에 연봉협상을 성공적으로 잘 치러내거나 유망한 프로젝트를 도맡는 광경을 지켜봐왔다. ‘바쁘게 사니까 진짜 돈이 나오잖아? 정신 차려, 쟤들 반만큼은 노력해야지’ 하는 마음이 최근 들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지만 애초에 설정한 ‘내일이 없는 네버랜드인’이라는 포지션을 바꾸기란 쉽지 않았다. 동생들하고 놀면 좋은 점은 내 나이만 잊으면 딱 그 친구들만큼의 고민과 방황 선에서 민물에 사는 물고기처럼 노닐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퇴행이자 회피 반응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내게는 일종의 방점이 필요했던 것 같다. 2025년도에 내가 또 그 친구들과 모여 술잔을 기울일 수 있을까? 철 든 피터팬은 이제 한숨이 푹푹 나오지만 스스로를 다잡아야 하는 씁쓸한 오기와 독기 가득한 동년배들의 현실로 복귀해야겠지.
2) 너희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샀어
조금 무겁고 슬픈 얘기다. 내가 1차를 계산한 건 ‘이 친구들이 뭐가 아쉬워서 나랑 놀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깔려 있어서다. 물론 술쟁이 관상을 알아보고 한 명 두 명 같이 마시자며 불어난 모임의 주최자가 나라는 것이 또 어처구니 없는 포인트이긴 하지만, 주최자가 자존감을 찾지 못하는 모임도 있으려면 있을 수 있는 거다. 점을 볼 때도 돈을 내고, 상담을 할 때도 돈을 낸다. 나는 내 이야기를 듣고 웃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 좋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이건 공짜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을 보면 그 친구들은 진심일 수 있겠지만 내 마음의 순도는 그리 높지 못했던 거다.
3) 같이 돈 없지만 그래도 내가 낫겠지
절대연령 차이가 8살, 9살씩 있다 보니 술값을 계산할 시간이 다가올 무렵이면 가본 적도 없는 그들의 허름한 자취방, 간당간당한 통장 잔액 등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면서 ‘다들 3만원씩 보내주세요’라는 말을 못하게 되고, 처음에는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천원 단위 이하를 깎아서 정산하는 등 소소하게 양심을 발휘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1차를 사지 않고서는 영 마음이 찜찜한 단계에 이르렀으니, 어제의 17만원은 역시 이 모임의 분수령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정말 내 신용카드 고지서를 생각해야 할 때다. 어제의 기념비적인 영수증은 현관문 정중앙에 붙여놓았다. 집에서 나갈 때마다 한 번씩 쳐다 보면 내 경제관념의 코어가 조금씩은 단단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