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엔 소주지

오늘도 망했다_청빈하고 싶은 소비일지

by 써드

투썸플레이스 얼그레이쉬폰 홀케이크 36,000원 + 일품진로 13,000원


생일은 훌쩍 지났으나 도통 만날 기회가 없어 친구 집에 방치되어 있던 선물을 수거하러 갔다. 무엇이 갖고 싶냐고 물었을 때 너무 솔직하게 ‘에르메스 향수’라고 말한 탓에 해외 통관까지 거쳐가며 한국에 도착한 물품이었는데, 그저 안 지 1년도 안 되는 동네 친구에게서 받기에는 너무 과한가 싶어 설렘을 동반한 자책을 많이 했다. 애초에 향수를 말하는 순간부터 다가오는 친구의 생일은 조금 특별하게 돈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참이긴 했다. 그래도 제법 고가의 선물을 받으러 가는 입장에서 빈손으로 가기에는 머쓱하고 민망해서 일부러 한 정거장 일찍 버스에서 내려 칼바람을 맞아가며 ‘케익 명가’ 같은 컨셉으로 열심히 브랜딩 중인 투썸플레이스로 향했다. 이 바쁜 친구를 크리스마스 전후로는 못 볼 것 같아서 간단히 곁들일 술도 샀다.


모든 건 시절 인연이며, 끼리끼리 만난다. 이 친구의 경우, 경제력 측면에서는 아니다. 판도라의 상자까지는 아니지만 언젠가 서로의 연봉을 알게 되면서부터, 소박하기 짝이 없는 작은 오피스텔에 사는 내가 한참 뒤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 넷이서 소곱창을 먹었는데 30만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을 흔쾌히 계산하는 친구를 보며 찌뿌둥한 부채감을 안고 집에 갔던 적이 있다. 그 후로 한 번쯤 내가 소곱창을 대접했는데, 그날도 통장의 측면에서 ‘오늘도 망한’ 날이었다. 벌이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이 친교를 맺으면 많은 사람이 덜 쓰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적은 사람이 무리를 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을 만하면 이 친구를 만나게 되는 끼리끼리의 요소도 존재한다. 대단히 기민하고 현상에 대한 이해과 판단이 예리한 친구다. 그날그날 느끼는 케미스트리의 정도는 다르지만 이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고양감이 든다. ‘그래, 대화는 이런 맛이 있었지’를 느끼게 한다. 특히 친구네 집에 있는 대형 TV로 유튜브를 틀어놓고 서로가 좋아하는 곡들을 번갈아 틀어가며 소소한 음악평을 나눌 때가 좋다. 어제는 파인애플 도둑과 메탈리카 비교하기도 했고 카시오페아의 오래된 뮤직비디오를 보며 새로운 감회에 젖었으며, 데이식스의 선전과 약진에 대한 분석도 몇 가지 나누었다. 영국스러운 음악의 특징에 대해서도 수다가 이어졌다. 막판에는 새소년과 터치드 중 누가 덜 오글거리는가에 대한 밸런스 게임을 했고, 터치드가 판정승을 거둔 끝에 실리카겔이라는 내가 모르고 있던 밴드의 음악을 들을 기회도 접했다. 취향이 같아서 이야기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 취향을 말하는 밀도나 깊이가(이 단어도 참 별로지만) 비슷해서 말이 이어진다. 이런 친구라면 흔쾌히 케이크와 소주를 사 들고 가서 내 시간을 쓸 수 있다.


집에 돌아와서 언젠가 백화점에서 시향한 적이 있는 향수를 살짝 뿌려보았다. 나와 어울리는 향일까? 에르메스 가방에는 관심이 없지만 소확명행(소소하고 확실한 명품이 주는 행복)의 측면에서 분사되는 향이 제법 그럴싸하다. 잔향과 함께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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