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업데이트의 길목에서

by 써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에 필사적으로 옷깃을 사수하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만원 지하철을 탈 때, 길을 오갈 때, 카페에서 주문을 위해 줄을 설 때 광인감별사처럼 어딘지 이상해 보이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물리적인 거리를 두곤 했다. 인연의 생성과 지속에 대한 순진한 직역을 했던 시기였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때 이미 같은 공간의 산소를 마시며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 어떤 타인이라도, 심지어 미국의 대통령이라도, 일곱 번만 인연의 다리를 거치면 아는 사람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현상에 이름을 붙인다면 ‘지구촌 법칙’쯤 되겠다. 그 사실은 위로와 동시에 갑갑함이었다. 나는 ‘위아더월드’가 아니라 소중한 존재들을 꾸려서 ‘마이월드’를 구축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사람과는 겸상도 하기 싫다’라든지 오늘은 험한 말을 들었으니 ‘귀를 씻고 자야겠다’라는 표현을 즐겨 쓰곤 했다. 하지만 내 안에 도사리는 모종의 귀족주의가 우생학이나 나치즘의 토대가 될 정도로 편파적이고 배타적이지는 않았다는 변명을 하고 싶다. 희귀한 나비를 유리상자에 박제하거나 일종의 인맥 호더처럼 게걸스럽게 나와 격이 맞는 사람들을 찾아 나선 건 아니었다. 그저 이중삼중으로 생각의 결계를 쳤을 뿐. 그 안에서 하루라도 마음을 놓고 소통하고 싶었을 뿐. 즉, 나의 까탈스러운 선별 의지는 ‘나는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니 그와 맞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가 아니다. ‘더 이상 상처 주거나 상처 받고 싶지 않다’에 가깝다. 나를 귀족주의에 이르게 한 그 많은 생채기는 다 어떻게 생겨났을까.


현실의 나는 사람을 만날 때 너무도 조심성이 없다. 한 가지 특성에 강렬한 호감이 생기면 그대로 돌진하는 편이다. 나의 호감을 망설임으로 되받아친다면 인연에 대한 포기는 또 광속으로 빠르다. 그런 식으로 맺어진 인연이 과연 안전했을까. 내가 뒤통수를 치기도 하고 상대가 내 뒤통수를 치기도 했다. 그래, 인간은 다 불완전하고 털면 먼지가 나오지, 하면서 씁쓸하게 여겼다. 그때 내가 때리거나 맞은 뒤통수가 내 경계심을 공고하게 했는가 아니면 만민 평등주의로 가기 위한 초석이 되었는가는 아직 미지수다.


옛 성현들은 이런 나의 고충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끼리기리 논다’는 명언을 남겼다. 여기에 ‘끼리끼리 놀고 가지가지한다’라고 문장을 조금 더 길게 써도 되겠지. 내가 간과한 것은 인연이라는 것은 내 기준과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거국적인 우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인연’이라는 사건의 출발은 내 생각이 아니다. 그리고 인연이 맺고 끊어질 때는 관계 그 자체로 유기체였던 그 무엇이 자생하다가 생로병사와 희노애락을 겪는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대전제하에 다시 없을 우정도 전성기가 있고 쇠퇴기가 있는 법. 그리고 정신 차려보면 나는 이미 인력과 척력에 의해 끼리끼리 놀고 있다. 그러다 보내거나 떠나오기도 하고 그렇게 만나고 맞이한다.


앞으로 내가 알게 될 인연이 궁금하다. 내가 잊게 될 인연이 궁금한 것과 마찬가지로. 10년 전에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90퍼센트는 또 다른 인연의 틈바구니로 사라졌다. 더군다나 내게는 주기적으로 인연을 정리하는 고약한 버릇까지 있으니, 이런 나를 견디며 인연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새롭게 다가오는 인연들은 급하게 베프 목록에 올리거나 소울메이트 등의 지위를 성급하게 부여하지 않고, 천천히 차를 마시듯 인간의 깊이와 시간의 흐름을 음미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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