냥생을 마친 보리에게

~251026

by 써드

성수역 펫샵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20만원에 데려온 ‘아메리칸숏헤어’ 라크는 생후 5개월 만에 한쪽 다리에 누런 털이 조금 올라오는 것이, 얼굴도 어째 아메숏 특유의 빵빵함 대신 갸름하게 하관이 빠진 것이, 코리안숏헤어의 유전자가 섞인 아이였음을 알게 되었다.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10년이 넘게 묘르신으로 버텨준 라크가 악성 종양으로 불현듯 떠나고 반년이 넘도록 적적하고 텅 빈 듯한 본가를 보며,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아비시니안 캐터리에게 연락을 한 것은 그놈의 품종 로망 때문이 아니라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2, 3개월령의 한창 귀여운 아비시니안을 입양하기에는 당시 내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마침 캐터리의 블로그에는 임신을 하면서 남매 고양이를 파양한 부부의 사연과 함께 두 마리를 함께 데려가는 조건의 입양홍보글이 올라와 있었다. 분양가는 아기고양이의 60퍼센트 선이었다. ‘한 마리만 데려가도 되나요?’ 하고 댓글로 질문한 때부터 죄책감과 염려가 뒤섞인 묘연이 시작되었다.


천안아산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캐터리의 독채 빌라 앞에서 내렸을 때의 광경을 잊을 수 없다. 빌라 저편으로는 마침 오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고 길가에는 어미로 보이는 고양이와 노랑둥이 치즈태비 아가 몇몇이 쫄쫄 도로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분명 꼬질꼬질하겠지만 뽀얀 털이 모래바람을 맞으며 빛나는 듯 따사롭고 한가로운 풍경이었고, 저 아이들을 두고 나는 순종 아비시니안을 입양하겠다고 빌라로 들어섰으니 그때 고양이 세계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나를 보면서 끌끌 혀를 찼을 것이다.


독채 빌라는 층층이 아비시니안 아가들이 특별히 관리되고 있었으나 실내 양육 환경 탓에 쿰쿰한 냄새가 확 끼쳐왔다. 캐터리의 안내에 따라 파양된 남매가 있는 방으로 갔을 때 두 녀석은 커다란 캣타워를 오르내리며 서로 볼을 부비거나 그루밍을 해주는 등 친밀도가 높아 보였다. 오빠인 수컷을 입양하려고 갔지만 어딘지 조금 더 순해 보이는 암컷 동생에게 마음이 갔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이 아이로 바꿔도 되나요?‘라는 편리한 질문을 한 것이 또 마음에 짐처럼 남는다.


고양이는 기차역으로 가는 내내 울어서 캐터리에게 이대로 기차를 타면 소란이 염려되니 부산까지 가줄 수 없냐고 턱없는 부탁을 했을 정도였다. 아마도 홀로 남겨진 방에서 수컷인 오빠 고양이도 어리둥절 눈망울을 굴리며 울음을 토하고 있었을지 모르지.


기차에 앉자마자 울음을 그친 고양이는 그 길로 부산 본가의 가족이 되었다. 나는 송아지 새끼마냥 누런 모습을 황금빛으로 격상시키고 싶어서 ’골드‘라는 새 이름을 제안했지만 부모님은 ’보리‘라는 흔하디 흔한 이름을 지었다. 보리야, 이것이 네 부산 생활 시작의 전말이자 오빠로부터 멀어진 사건 경위란다.

당시 두 살쯤 된 너는 그로부터 3년을 더 살다가 바로 오늘 세상을 떠났다. 끝까지 복막염인지, 아니면 또 다른 질병인지 확진을 받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이제 오지 못할 길을 떠난 지금, 내내 마음에 걸리던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청산하고 오롯이 너를 추모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부산에 내려가 너를 볼 때마다 함께 데려오지 못한 네 오빠 생각이 났다. 한 번씩 마음에 걸려 입밖으로 꺼낼 때마다 ‘고양이는 그런 거 몰라’ 하는 섣부른 인간의 위로도 받았었지. 너는 정말 몰랐을까?


보리야. 고양이는 그저 일광욕과 그루밍이면 충분하다고 편하게 생각하려고 했어서 미안하다. 신약을 구해서 알음알음 치료법을 찾아 84일을 꼬박 먹여 살리려고 했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서 24일 만에 서둘러 무지개 언덕으로 갔는지 모르겠다. 추석에 작은 유리문 너머로 동물병원에 입원해 있는 너를 보러 갔을 때, 멀뚱하게 초점을 잃은 눈망울이 내 기억에 남은 마지막 생의 흔적이 되었구나.


보리야. 너는 얼마나 외로웠니. 우리를 사랑했니. 시간이란 너에게 무엇이었니. 고양이의 일생이란 숙제였니, 존재의 상태였니, 사료와 간식을 오가는 지루한 섭생이었니. 7층 아파트 베란다의 햇살을 고이 품고 가렴. 나와 부모님, 너를 살리려고 통장이 텅장이 된 내 동생의 이름으로, 우리가 보낸 다른 아이들처럼, 그렇게 언제나 너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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