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無)에 도달하지 못한 없다는 것에 대해

by 써드

의욕이 없다. 설거지도 한참을 마음 먹어야 한다. 쓰레기 한 번 버리려고 머릿속으로 10회는 넘게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저걸 저렇게 싸서 요렇게 정리한 다음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다시 쓰레기통에 비닐봉지를 씌우고,.. 그러다가 마지못해 하는 한 번이지만 사실상 10회는 넘게 쓰레기를 버리러 오르락내리락 한 것 같은 피로감이 든다.


없다는 것은 있어야 한다는 마음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에 없다는 것에 문제의식이 생긴다. 이렇게 의욕이 없어도 되나? 저놈의 쓰레기 버려야 하는데 안 버리고 있으면 실시간으로 따뜻한 방 안에서 저 안에 든 것들이 부패하겠지. 음식물 쓰레기가 담겨 있는 건 아니지만, 햄버거를 쌌던 종이, 코를 풀었던 휴지 등에는 오래 두면 분명히 탈이 나는 것들이 섞여 있을 텐데.


오도카니 앉아서 많은 것들에 대해서 ‘없는’ 대신에 ‘무’에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있다, 없다는 마음조차 사라진 평온. 나 자신아, 쓰레기를 버리지 말려면 당당하게 버리지 마! 있다는 것조차 잊어. 그리고 오도카니 앉은 이 방에서 가장 거대한 쓰레기인 것 같은 나 자신에 대해서도 너무 깊게 생각하지를 마. 그러다 보면 또 병이 되는 거야. 존재 자체를 문제시 하지 말고 네가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돼. 어디서 뿔테 안경을 쓴 것 같은 자아가 뒷짐을 지고 도사리면서 잔소리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안부를 주고받는 말들 사이로 나를 강렬하게 깨어있게 만드는 문장이 단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자급자족으로 나를 깨어 있게 해야 되니까 이렇게 글이라도 쓰는 거다. 지금까지 써내려온 문장 중, 마음의 쓸모가 있는 문장이 있었나? 또 다시 있다, 없다로 싸우는 마음. 그래 있든지 없든지 모르겠다.


제대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 언어의 벽 사이에 나를 가둬두지 않아야 한다. 글을 쓰다 보면 ‘나는 살아있다’는 간단한 문장조차 영 마음에 차지 않는다. ‘나’는 존재한다는 것도 미심쩍다. 또 다시 뿔테의 자아가 등장한다. ‘너답지 않게 왜 이래?’


“나? 나다운 게 뭔데(희대의 클리셰)”


나다운 것이야말로 이렇게 있다 없다와 무를 놓고 의미를 둘러싼 절망의 게임을 하는 듯 고즈넉하게 고여 있는 모습 그 자체다. 술이나 한잔 마실까? 이 친구야. 술을 마실 거면 ‘술이나’를 마시지 말고 ‘술 자체’를 마셔.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서 한 잔을 해 봐. 하지만 나에게 술이란 언제나 ‘술이나’다. 세상이 ‘그러므로 술’이 아니라 ‘술이나’를 조장한다고 볼멘소리를 하고 싶다. 대체재가 술이라면 무엇이 내 마음의 진짜 욕구인가. 여기서 또 있다와 없다 따위는 종횡무진으로 날려버리는 개념이 등장한다. 진짜와 가짜. 아 지겨워. 언어라는 것은 철저한 이분법의 산물이고,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또 쓰면서 제3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진다. 그러고 보니 나는 참 3을 좋아하는구나. 헤겔의 문장 한 줄 진심으로 읽지도 않고 정반합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저 삼각의 균형감을 참 좋아했지. 성호를 긋는 동작조차도 삼각이라서 좋아한다.


“너무 안 좋은 생각만 하지 마.”


누군가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안 좋은 생각이란 또 무슨 좋은 생각에 따라붙는 망령인가. 나는 A4 한 장을 채우는 이 고군분투의 시간 동안 대기의 꽉 찬 진동을 느낀다. 냉장고 소리, 고양이의 숨소리, 내 작은 한숨이 섞여 ‘산다는 것’을 형성한다. 살아있다는 말도 거슬려서 겨우 생각한 말이 ‘산다는 것’이다. 살면 살지 ‘것’은 뭐냐. 죽음을 저편에 두지도 말자. 나는 존재 중이다. 과녁을 향해 비틀비틀 날아가는 화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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