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는 이런 저런 실패 끝에 진지하게 삶을 마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했던 그때 그 언니의 나이가 몇살이었더라. 대충 3년 전에 그 말을 들었으니 이제 내가 얼추 그런 불온한 생각을 할 만한 생애주기에 접어든 것 같다. 전리품을 반환하듯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꿈들을 하나하나 반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걸 보면 말이다.
버리려고 꺼내놓은 골동품 같은 마음들을 하나씩 늘어놓고 보니 조금씩 본래의 색을 되찾는 꼴이 내가 어지간히도 정신적, 사상적 호더 기질이 있나 보다. 아직 놓을 수 없는 것들투성이다. 이 웬수 같은 가능성을 지그시 눌러밟아 아주 숨통을 끊어놓고 싶다. 몇 개만 지워내도 거기에 사로잡힌 망령 같은 미련의 에너지를 새 힘으로 전환할 수 있을 터다. 횟집을 한다면 내 수족관은 매일 반짝반짝 윤이 날 거고 붕어빵을 굽는다면 노릇노릇하니 균일한 양의 팥을 투여해 남다른 맛을 낼 수 있겠지.
고전 SF 영화 ‘가타카’에서 명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두 사람이 바다 멀리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수영 시합을 하는 씬이었다. 열등한 유전자를 지닌 쪽이 매번 이길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나는 돌아올 때 쓸 에너지를 남겨두지 않는다’고 했던가. 나는 그 대사를 ‘안전을 추구하다 보면 삶이 어중간해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전력질주를 지향했다. 분위기가 얼추 그랬다는 뜻이다. 지향과 진실은 다르다. 돌아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을 기세로 무언가에 전념한 적이 없다. 그럴 만하면 내 신체가, 정확히는 뇌에 과부하가 왔으니까.
할 만하면 스텝이 꼬이고 넘어졌다. 이 말은 진실인가. 일부는 거짓이다. 나를 온전히 걸고 세상의 통과의례에 진지하게 임하는 대신에 ‘형의상학의 근본원리’ 같은 책의 한 페이지 안에 숨어 버렸다. 그때는 그것이야말로 진정 가치 있는 고뇌라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한 시절 쬐기 좋은 모닥불이었고 일종의 ‘불멍시간’이었다. 덕분에 얻은 것은 일상을 온전히 실체라 여기고 살아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삶의 큰 재능이라는 깨달음이다.
퇴근시간에 집으로 돌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등짝을 보고 있노라면 다들 보람찬 하루를 보낸 것 같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저들 중 상당수는 인생 자체에 몰입이 안 되어 있으며, 저마다의 모르핀으로 버티고 있다는 것을. 붕 뜬 발을 온전히 착지시키는 데 적어도 20년을 쓴 입장에서 내 눈을 속일 수는 없다. 나는 그들에게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는 법을 조금씩 알려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한데 말 거는 법을 모르겠다.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러다 무심코 하늘을 보니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이들이 보인다. 아, 우리가 같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는 있지만 저들은 같은 고도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교류하지 아래를 내려다보지는 않겠구나. 나는 그들 틈에 섞이고 싶은 걸까, 아니면 아직도 생이 어리둥절한 이들의 손을 잡고 싶은 걸까. 애초에 나에게 선택지라는 게 있을까.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언가를 떳떳하게 포기할 수 있는 적정 연령은 몇 살일까. 얼마나 데이고 아파야 이제 완전히 놓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이런 터무니없는 질문에서 출발한 글이 결국 하나의 생각으로 회귀한다. 나는 지금 겸허하게 걸음마를 배우고 있다. 걷자. 걸어보자. 버릴 수 있으면, 포기할 수 있으면 그것은 꿈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