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기억들이 걸어가는 섬이 있다. 너무 아프고 부끄러워서 뿌리조차 잘린 채로 망망대해를 떠돌다가 해변에 떠밀려온 색이 바랜 미역줄기 같은 기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장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 우리가 무슨 대화로 그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잊을 필요도 없지만 간직할 수도 없어서 허랑방탕하게 흘려버린 일상의 기억.
오늘이란 언제나 단 하루이기에 탈곡되는 무수한 어제와 그저께, 그끄저께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이 언젠가부터 조금씩 아찔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사라진 듯 상기되는 기억의 양도 부쩍 많아졌다. 그래서 나는 기억이 걸어서 당도하는 섬이 있고, 그 섬으로 가는 열쇠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실상은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다. 벨을 누르고 도망가는 기억들에 일일이 ‘저 녀석 참!‘ 하고 화를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거울을 보는 어느 아침에 온 얼굴에 등고선 같은 주름이 가득하다면 나는 맨정신으로 살 수 없을 텐데, 기억도 마찬가지다.
내가 겪은 총 사건에 대해 보존할 수 있는 기억은 매일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그러다 어떤 날은 그래프가 수직하강하듯 흥얼거리고 있는 노래 제목이 생각나지 않기도 하고, 행인의 뒤통수에서 그리운 이의 얼굴이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때로는 져주지만 끝내 내 발걸음을 주춤주춤 이끌어가는 줄다리기를 하는 기분이다. 아마도 기억이 쌓여 있는 그곳 섬지기의 배려일 수도 있겠지. 사라지는 줄도 모르고 사라지는 거니까 아프지도 않은 줄 알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아마도 잊지 않으려고 그러쥔 추억의 등살에 밀려난 기억이,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고 구멍 난 그 자리로 바람이 숭숭거리는 중인지도.
단 하나의 기억을 안고 가야 한다면 나는 여전히 오늘이 아니라 그날들이다. 그래서 내가 놓치고 사는 기억들을 기꺼이 잘 보내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