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징의 권리와 보상

by 써드

바퀴가 달린 커다란 이민가방을 질질 끌고 대학 기숙사에서 도보 15분 거리에 위치한 첫 자취방으로 이동하던 어느 오후가 떠오른다. 그때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지. 편하게 부를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부르지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흔쾌히 이사를 도와줄 동기나 선후배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내 쪽에서 괜히 누군가를 수고롭게 하면서 요란한 이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몇 번 더 왕복운동을 하는 게 낫지 폐를 끼치기가 싫었다. 내가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그때 이민가방을 옮기던 내가 있는 시공간으로 날아가 확성기를 손에 들고 이렇게 외치고 싶다.


“지금 네가 퍽 자주적이라 생각하는 ‘혼이사’를 시작으로 네 인생은 아주 지독하게 꼬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짐이 무겁다고 누구에게든 여기 저기 전화를 걸어 징징거리는 연습을 하도록 하라!”


정말이지 정말이었다. 방을 자주 옮겨다니던 나는 이사 때마다 아무도 부르지 않았는데, 아마도 도와준다는 손길조차 한사코 거절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고 ‘안 주고 안 받은’ 것도 아니다. 다른 친구의 이사를 돕느라 땀을 흘린 기억은 점점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혼자 이사를 한다는 상징적인 현상을 필두로 크고 작은 불편과 불안, 절망의 순간마다 힘들다는 말을 하지 못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안으로 쌓고 또 쌓아서 곪아터진 고독의 위력으로 약을 먹기도 하고 때로는 종일토록 병실 천장을 응시하기도 했다.


“네가 왜 우니. 내가 더 힘들다.”


나의 유년과 청소년기는 강렬하게 뜬 붉은 별처럼 나보다 더 아픈 가족구성원이 있었고, 유감스럽게도 그는 바로 어머니였다. 나는 약해지거나 슬픔을 드러내지 않도록 적당히 무감하고 무뚝뚝한 자식으로 성장했고 부모님의 양육 태도가 미치는 영향권이라 할 법한 얼추 40년을 도움을 거부하며 살았다. 처음 20년은 원래 그런가보다 했고, 나머지 20년은 왜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혼자가 되는지 의문에 싸인 채로 보냈다.


그리고 이제는 이 모든 사단의 배경이 내가 징징거릴 수 있는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으며 그에 따른 보상을 얻는 감각도 발달하지 않은 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직업적으로 얽혀 복지 관련 업무를 보는 이들을 가만히 관찰하면서, 그리고 그들을 찾아와 없다, 힘들다, 아프다고 말하는 이들을 보면서.


보유 주택과 토지의 공시지가가 10억이 훌쩍 넘는 노인이 ‘나는 수입이 없는데 왜 연금수령 또는 수급자 선정에서 제외가 되었느냐’고 항의한다. 주민자치센터 헬스장 요금을 100퍼센트 감면받으면서 말쑥한 차림으로 돌아가는 중년의 부부도 있다. 이보다 더 요란하고 유난스럽게 잘 자란 옥수수밭을 서리해 가는 듯한 이들도 있다.


아버지는 평생을 목수로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았다. 나 역시 유전적으로 오늘만 산다는 의식이 각인되어 있는 듯하다. 나보다 힘든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 이 각박한 인생월드에서 함부로 울지 않고 징징거리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남아야겠지. 처음은 내 선택이 아니었으나 이제부터는 의식적으로 ‘나는 그렇게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선택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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