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도 너의 누나가 되겠다

by 써드

몇 달 전 본가 방문 때 거의 쓰지 않는다며 동생이 나에게 버린 아이패드를 얼씨구나 받아와서 그간 서랍 한구석에 내내 방치해 오다가 ‘그래도 동생이 준 건데’ 하면서 아이패드 연동용 블루투스 키보드의 소비 근거를 만들었다.


착잡한 월요일을 앞둔 일요일 오전이야말로 무언가를 사기 딱 좋은 때다. 전봇대 철거 공사로 시끄러운 거리를 요리조리 피해 오픈하자마자 교보 핫트랙스에 가서 동그란 자판이 앙증맞은 무소음 키보드를 구매했다. 바탕화면과 위젯을 조정하고 자주 쓰는 어플을 보기 좋게 정렬시켜 놓으니 내 삶이 한결 정돈된 것 같다. 동생 덕이다. 지난 해 동생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대필해준 보람이 있다.


우리가 가족이기 때문에 동생을 애틋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가족 구성원이라는 것은 참고할 만한 환경적 요소일 뿐, 인간 대 인간으로서 끌리지 않았다면 현실남매는 고사하고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와 동생 간의 관계는 조금 특수하다.


3살 터울의 동생과 나는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이 없는 시간을 같은 취미를 공유하면서 보냈다. 라면 끓여 먹기,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후레쉬맨, 드래곤볼 빌려 보기, 처지가 비슷한 아이들과 뒷산에서 놀기 나의 유년은 동생과의 추억으로 강렬한 노스탤지어를 형성한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대체로 그러하듯 우리의 교신은 끊어졌으니 유년은 구름위에 뜬 섬처럼 독보적으로 그립고 돌아갈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대학 입학과 함께 타향살이를 시작하면서 이제는 동생이 쓰게 된 내 방의 쓸데없는 흔적을 지워주려고 책장을 정리한 적이 있었다. 어설픈 수집벽으로 망령처럼 꽂혀 있는 서양 철학의 고전과 세계문학전집 등이 일거에 철퇴를 맞고 퇴장했다. 그 자리에 무기로 써도 될 것 같은 동생의 두꺼운 대학 전공서적들을 한 권 한 권 채워 넣는데, 책장 한구석에 외로운 풀 한 포기처럼 쪼로록 꽂혀 있는 낡은 공책이 있어서 보니 나와 동생의 초등학교 일기장이다.


동생의 일기장을 펼쳐 한 장씩 넘기던 나는 돌연 주위를 살피다가 조용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반 이상이 넘는 일기가 ‘그래서 아팠다’로 끝이 난다. 삼촌 집에 놀러갔는데 머리가 아팠다. 친척들하고 술래잡기를 했는데 열이 나서 집에 왔다. 힘이 없어서 힘들었다. 그랬지 참. 동생은 선천적으로 ‘안구진탕’이라는 진단을 받아 일찍부터 안경을 썼고 자주 열병을 앓았다.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서 쉬고 싶다’

더 이상 나에게 놀자고 하지 않는 동생의 안부가 궁금해 몰래 동생의 미니홈피에 들어갔을 때 적혀 있던 글을 봤을 때도 어딘지 아득하고 막막한 기분이었다. 수능시험을 본 뒤 어느 과에 들어가야 할지를 묻기 위해 딱 한 번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그때 나는 고향 사투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모기만 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것이 내내 미안했다. 서울살이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동생의 전화가 부끄러웠다.


주로 고양이의 안녕에 대한 이슈가 있을 때 우리는 카톡을 주고받을 뿐이지만 내 인생의 후미진 길목마다 동생의 영향력이 발휘되곤 했다. 피아노 학원을 관두게 된 것도 동생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가난한 집에서 음악한다고 설치는 꼴을 두고 ‘쪽팔린다’고 한 말이 마음에 사무쳐 도저히 고집을 세울 수 없었다. 그래도 동생이 밉지는 않았다.


지금도 동생과 비슷한 대여섯 살의 소년을 보면 뜻모를 측은지심이 밀려온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로 시작되는 노래는 내 눈물버튼이다. 다시 태어나도 나는 너의 누나가 되겠다고 한다면 동생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십중팔구 노땡큐라고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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