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속 노화를 꿈꾸는 새벽

by 써드

빨리 늙고 싶다. 늙음으로 가는 아우토반이 있다면 광속에 가깝도록 질주하고 싶다. 철 모르고 하는 소리인 것이 이미 나는 잘 익은 생선구이처럼 앞뒤로 노릇노릇하게 잘 늙었다. 그래도 이제 막 들어선 40대라는 또 하나의 청춘이 버겁다.


나이듦이란 피아노로 치면 저 밑에서 시작된 도레미파솔라시도에서 옥타브만 바뀌어 또 다른 도레미파솔라시도 안에서 비슷한 악보를 연주하는 일 같아서 마흔의 동네에 와서까지 자괴감, 환멸, 질투, 무모한 도전이 계속될 줄은 몰랐다. ‘마흔’의 자리에 ‘쉰’과 ‘예순’을 넣어도 어느 정도 말이 될 거라는 점도 알고 있다. 요즘 내 직업상 주로 어르신을 상대하다 보니 온화한 포커페이스가 자주 무너지고 그 자리에 서글픔과 권태, 때로는 짜증이 스미는 것을 목도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광속노화의 꿈은 사실상 중학생 때부터 시작되었다. 자유주제로 글짓기를 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쓴 글에는 노인이 되면 추억을 먹고 살겠다는 포부가 담겨 있었고, 어쩌다 보니 교내 신문에 실려 어머니를 향한 인정욕구가 치솟았다.


“너는 왜 슬픈 생각만 하니. 다른 집 딸들은...”


실패였다. 어머니는 내가 무언가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길 원했으나 나는 수업시간에 보라색 펜만 들고 다니며 무너진 피아노의 꿈 대신에 작곡을 배우겠다고 교내 음악선생님의 개인지도를 받고 있었다.


의욕과 선의로 가득했던 선생님은 화성악을 알려주며 작곡의 세계에 눈을 뜨게 했는데 어느 날 교무실로 나를 불렀다.


“내가 알아보니까, 작곡도 피아노만큼이나 돈이 들어서.....”


감당할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 나는 ‘왜 사냐건 웃지요’ 하는 표정으로 돌아서서 음악에 대한 꿈 접붙이기가 좌절되었음에 목울음을 삼켰다.


인생의 어떤 구간은 반드시 의사가 필요한데 스스로 필요성을 자각하지 못한 채로 흘러가기도 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기준치 이상으로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중2라서, 누구나 질풍노도의 한가운데 있기에, 방황하고 무너져야 어른이 된다는 소리를 삑삑 해대는 책도 마침 인기를 끌고 있었기에 다들 그런 줄 알았다. <힘들면 정신과에 가세요>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대학시절을 끝으로 첫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그간 잠복하고 있었던 흑염룡인지 흑염소인지 하는 녀석이 내 안에서 꿈틀 하고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로부터 20년이었다. 처음에는 독서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집중력을 앗아가더니 정해진 시간에 스르르 잠이 드는 능력마저 소진되었다. 입퇴원이 반복되어 갈수록 그 어린 중학생이 왜 청년기와 중년기를 건너뛰고 노년기를 선망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무너진 마음으로 끊임없이 돈을 벌어야 하는 내가 귀찮았다.


이 시기 동안 나는 세상에 꼭 나와야 되는 책 세 권을 머릿속에 품고 다녔는데 첫 번째는 법의학자나 소방관이 쓴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실제로 죽음을 선택한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최후를 맞는지, 그 현장을 글로 알려주는 책이 꼭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야 덜 죽을 것 같아서. 또 한 권은 ‘죽어가는 며느리를 위한 사회학’이었다. 시댁과 며느리의 갈등을 한 번쯤 해부해서 이 사회의 고질적인 불화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세 번째는 잘 실패하는 법, 즉 낙법을 알려주는 책인데 불행히도 세 권 다 기획의도에 맞는 제대로 된 모습으로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빛이 들지 않는 원룸, 신용카드 빚을 갚기 위해 몇 달 전 어머니에게 호기롭게 드린 돈을 도로 달라고 해야 하는 상황, 계약직 교대근무로 편의점 삼각김밥과 빵으로 창고에서 혼자 밥을 먹는 시간이 이어지는 통에 의식주에 생긴 균열이 점점 더 첨예해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리고 잘 망해야 한다. 비록 자력으로 잠을 잘 수는 없지만 차디찬 영하의 새벽에 비상시국의 콘트롤타워처럼 오롯이 깨어 있을 수는 있다. 하루만큼 늙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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