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묘한 인연의 매칭으로 운전 가능자의 연인이었을 때, 한동안 선물처럼 조수석에 앉는 호사를 누리던 시기가 있었다. 나는 네비게이션의 지시를 적재적소에 파악해 운전석의 혼란을 줄여주는 타입의 조수는 결코 아니었고, 오히려 큰 트럭 하나만 곁을 지나가도 허엇! 하면서 부리나케 조수석 우상단의 손잡이를 잡는 통에 운전자의 짜증과 불안을 유발하던 불량 조수였다. 그나마 편하게 잠이 들지도 못했으니 적어도 조수석에서 코를 고는 민폐는 피해갔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일은 때때로 위험천만한 경험이었다. 한 번은 하얀 진돗개가 어쩌다 그런 견생의 시험에 들었는지 고속도로 한가운데를 황망히 달리던 통에 식겁한 운전자들이 개를 피해 여기 저기 차선을 바꾸고 신고를 받은 경찰이 따라붙는 것을 목격한 적도 있다. 나는 위기 시에 땅에 얼굴을 묻는 타조처럼 차마 개의 사투를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고 무사히 구출되었는가는 아직도 미지수다.
“아빠의 빈자리가 그리워요”였던가. 졸음 운전을 예방하기 위해 써붙여놓은 갖가지 자극적인 내용의 현수막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트럭 뒤에 눈을 그려 자동차를 의인화하는 것도 아마 안전을 위한 조치였겠지. 그런데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표지판이 있었다. 바로 ‘낙석주의’다.
“낙석을 어떻게 주의하라는 거야? 낙석이 떨어지는 시간표라도 있는 건가? 맞을 각오를 하고 지나가라는 건가? 자동차가 조심히 살살 지나가면 돌이 안 떨어지나...?“
한 번 낙석주의 표지판을 본 뒤로 의문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피할 수 없는 것을 조심한다는 게 당췌 가능한 이야기인가. 그 후로 나는 생각날 때마다 지인들에게 낙석주의 표지판의 존재 의의에 대해 묻고 토론하기를 거듭했으나 딱히 신통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면서 ‘낙석주의’야말로 가장 모순으로 점철된, 철학적인 표지판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낙석을 주의하면서 달려야 하는 게 바로 인생 같았다.
돌에 맞아 질주를 멈춘 시간들이 떠올랐다. 뺏긴 시간들, 흑역사라 쓰고 바로 뒤에 괄호를 쳐서 문장 밖으로 빼내고 싶은 괄호에 갇힌 시간들. 눈을 뜨면 침구를 정리하고 회진을 도는 의사와 인턴을 기다리던 아침, 배식을 받고 안전을 위해 주어진 포크숟가락 하나로 식판에 담긴 밥을 먹던 삼시세끼의 생활. 그때 내 인생에 낙석주의 표지판이 있었던가. 복선이라 할 만한 암시도 없이 낙석을 맞다 보니 나중에는 퇴원을 해도 병실 밖이 감옥인지, 병실 안이 감옥인지 헷갈렀다.
결국 깨달은 것은 아무도 내 인생의 낙석주의 표지판을 세워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직접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는 길목마다 매번 그려서 붙여 놓아야 한다. 그러고도 또 맞을 수 있는 게 인생이다. 표지판의 의의를 깨달아가면서 시원하게 펼쳐진 교통체증이 없는 도로를 달리는 것 같은 순간들에 대한 감사와 안도감이 생겼고, 늘 이렇게 달릴 수는 없다는 위기의식도 생겼다. 어쩌면 천운인지 조상신의 가호인지 모르게 내가 지나가자마자 떨어진 돌의 수도 꽤 될 것이다.
세상에는 낙석 없이 지나가는 불꽃 같은 마하의 인생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가는 길의 모퉁이에서 위용을 드러내는 기암괴석 대신 누군가 곧게 뻗은 가로수 길만 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데는 무언가 이유가 있는 거겠지. 뭐든 너무 집요하게 생각하다 보면 부조리에 빠지고 질서를 믿을 수 없게 된다. 그러니 너무 많이 맞았다고 생각하지 말자. 언제나 분명한 것은 세상에는 아직 내가 모르는 길이 많다. 그 길을 다 밟아보고 죽을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그저 주의할 수 없는 낙석에 주의하는 것, 그렇게 사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