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통대 국문과를 졸업했음에도 맞춤법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어머니와의 카톡창은 분명 찢어지는 슬픔을 예비하고 있다. 언젠가 식사하셨냐는 질문을 보내지 못하는 날이 올 텐데, 그럼 엄마를 위해 달리던 ‘달려라 하니’가 동력을 잃는 사태가 벌어질지 아니면 미친 말처럼 내달려서 그 끝을 알 수 없는 폭주의 시기가 찾아올지 알 수 없다. 요는 언젠가부터 어머니와의 카톡창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는 점이다.
고교 시절, 첫사랑이 불현듯 잠수 이별로 떠나고 경전을 알기 쉽게 풀이한 불교 서적을 많이 읽었다. 그중에서도 지금 또렷히 기억에 남는 단어가 ‘애별리고’다. 인간이 살아가며 겪는 여덟가지 고통 중에서 굳이 고통 올림픽을 열어 본다면 끝까지 남는 두 가지 고통이 바로 애별리고와 원증회고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슬픔, 즉 애별리고가 괴로울까, 싫은 사람을 매일 봐야 하는 고통인 원증회고가 괴로울까. 나로서는 애별리고를 넘어서는 고통을 찾기가 어려워 금메달을 수여한다.
서로 인사도 안 하고 1년이 넘게 지내다 작년에 다시 교류하게 된 이전 직장 동료와의 숨막힐 듯 소리 없는 갈등을 겪으면서, 미움으로 인한 고통은 양날의 검이라 내 쪽에서 출력을 높여 미워하고 적의를 드러낼수록 나 역시 내상을 입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증회고는 상처의 형태로 따지면 찰과상이나 자상이다. 그런데 애별리고는 어떤가. 별일 없이 산다. 밥도 잘 먹는다. 그런데 불현듯 무방비의 시간에 불쑥 단전에서부터 설움이 밀려와 눈꺼풀 속이 뜨거워진다. 마치 눈 안에 별이 뜬 것처럼 시리다. 없는 걸 있게 할 수 없는 현실과 있는데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야 되는 마음이 부딪혀 텅 빈 마음이 된다. 마치 드라이아이스로 인한 화상 같다.
원증회고는 지속력이 약하고 어느 틈에 고통의 리듬이 툭 끊어진다. 이직, 이사 등으로 해결이 되기도 하고 미운 정이라는 것도 있어 관절에서 나오는 활액처럼 고통이 상쇄되기도 한다. 그런데 애별리고는 죽음 앞에서도 투명하게 위용을 드러낸다. 여러 참사가 있었지만 5분 후 죽는다는 사실을 자각한 이들이 가장 먼저 문자로, 전화로 전한 것은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남은 사람들이 애별리고를 겪을 것을 직감했기에 자신도 알 수 없는 죽음의 여정 초입에서 사랑을 전하고 간다.
이별 선고를 듣기 한 달 전쯤인가. 카드 한 장을 받았다. 담담하게 써내려간 편지에는 사랑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주말 아침 꽃시장으로 가서 신문지에 특이한 꽃을 돌돌 말아오던 일상, 코스트코 와인 코너를 기웃거리다가 잔소리를 들었던 기억들이 차례차례 무너지는 동안 나는 서서히 인간의 형상을 한 껍데기가 되었다. 심장이 뛰는데 안 뛴다. 눈을 껌뻑이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또 다시 애별리고의 아침이다.
‘우리는 가족일까?’
헤어지기 전, 인스타에 업로드한 사진에 붙여 쓴 글이 내도록 사무치게 남아 있다. 나와 너, 그리고 캣타워 꼭대기에 앉아 있던 하얀 고양이가 베란다 유리에 반사된 것을 찍은 흐릿한 사진. 고양이는 알았을까. 다시 못 올 시간이라는 것을. 진작에 지운 사진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서 또 다시 애별리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