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미를 주지 않는 레이스

by 써드

정확히 이 자리, 방 한가운데 앉아 내게서 이별 통보를 들은 뒤 떠난 사람을 하루쯤 지난 오후에 다시 전화를 걸어 애걸복걸하며 붙잡곤 했다. 사실 붙잡으면서도 이렇게 물에 물 탄듯 관계를 복원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몇 번에 걸쳐 재회를 할 때마다 10분쯤 좋고 그 이후로 또 다시 파탄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이 관계는 서로에게 분명 숙제였다. 얼마나 더 하루하루를 채워야 끝이 날지 모르는 밀린 방학일기를 쓰는 기분으로 살았다. 그것도 일종의 사랑이라 생각했다.


퇴근 후 집에 오니 내가 없는 사이 고양이 식기, 모래와 화장실 등 자잘한 소품들이 대거 사라졌다. 나는 빌미를 주지 않기로 한다. ‘언제 왔다 갔어?’ 같은 메시지를 보내서 대화를 재개하는 순간 이 관계는 또 다시 알 수 없는 마력으로 정상화되려고 할 것이다. 가방을 내려놓고 차분히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있었는데 없어진 것들을 파악한다. 문득 나에게 아무런 빌미도 주지 않고 치밀하게 떠난 사람이 생각난다. 인생의 희안한 묘미 중 하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역지사지의 순간들이 왕왕 발생한다는 데 있다. 그때 그 사람, 나에게 이런 마음이었구나 싶다. 그래서 5년을 함께 살아 놓고 저녁 한 끼 하자는 소소한 제안마저 무참히 거절했겠구나. 나를 떼어낸 게 아니라 관계의 관성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구나.


고양이는 조금 다른 문제다. 마지막으로 고양이와 단둘이 보낸 주말이 떠오른다. 캣타워에서 잠을 청하다가 쭈욱 기지개를 켜고 내려와 알 수 없는 앙앙거림으로 나를 보채던 아이를 이리저리 쓰다듬으면서 그것이 마지막 감촉이 될 줄은 몰랐다. 내 입에서 또 다시 이별의 말이 나올 줄 몰랐던 것처럼,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일단 칼을 들어 잘랐을 때 고양이에게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하지 못할 거라는 옵션은 따라붙는다는 것을 인지해야 했는데, 어슴푸레하고 어설프게 끝나 버렸다. 그래도 고양이를 참 아끼던 사람이기에 양육권을 넘기는 일에 죄책감이 덜하다. 이렇게 무덤덤해도 되는 것일까?


큰 단위의 전환이 벌어질 때는 사실 눈물을 흘릴 여유도 없다. 어느 순간 눈물길이 막혀버린다. 차분히 포장해온 치킨버거를 먹고 사올까 말까 고민했던 소주도 생략하는 저녁이다. 어떻게 끝이 날지 궁금하기까지 했던 관계가 서서히 정리되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안도감과 서글픔이 섞여서 조용히 내려앉는다. 지금 이 순간, 이별 중인 모두와 주파수를 나누고 싶다. 괜찮을 거다. 이보다 더한 이별도 몇 번의 후폭풍 뒤에 동결건조되고 나면 바스락 하고 밟히는 낙엽같은 기억이었으니.


지나간 이별을 새로운 사람으로 덮으려고 했다. 꾸준히 몰입하면 그것이 사랑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사람 위에 사람을 덮어 잊을 수는 없었다. 다만 이렇게 이별한 뒤에야 비로소 이전의 이별을 납득하게 되었으니, 어떻게든 덮인 것은 맞다. 블랙아이스가 되어 꽁꽁 얼었던 길이 비로소 완전히 녹아 내 앞에 펼쳐진다. 다시금 사람은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랜만에 소식을 전해온 동생은 한 달간 연락을 주고받던 여자를 만나러 대구에 간다고 했다. 내게 남은 사랑과 지속의 에너지를 끌어모아 동생에게 퍼부어주고 싶다. 인연이 지고 핀다.


“너는 왜 봄 꽃을 보지를 못하니.”


겨울만 되면 병이 도져 입원을 한 뒤에 꽃이 지고 퇴원을 하는 사이클을 반복하던 나에게 언젠가 어머니가 건넨 말이다. 꽃이 뭐라고, 나는 계절의 순행보다 존재의 고독이 먼저였는데 이제는 간절히 봄을 기다리고 있다. 다가올 봄, 꽃이 필 때까지 내가 온전히 나로서 바로설 수 있을까. 사람과 사랑에 기대지 않고 내 몸을 통과하는 바람에 의연해질 수 있을까. 올해는 사랑하지 않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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