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닫는 곳에 물이 있고 휴지가 있다. 누운 몸을 일으켜 접이식 탁자를 끌어다가 노트북을 편다. 포털사이트 뉴스를 훑어보다가 아직 잠겨 있는 목소리를 확인하고 다시 드러눕는다. 전기장판의 출력은 언제나 2에서 멈춰 있고 오한이 밀려오면 이불을 끌어다가 두어 시간 잠에 든다. 배달된 김밥은 냉장고에서 다섯 시간쯤 방치된다. 네 개쯤 먹다가 식욕이 달아나고 처리할 엄두가 나지 않아 그대로 냉동실에 얼려버린다. 설 연휴를 전후로 총 4개의 병가를 내었으니 꼬박 열흘을 앓았다. 폭식의 리듬을 타고 30킬로그램 가까이 불어난 몸은 이제야 5킬로그램이 줄었을 뿐이다. 산술적으로 여섯 번만 더 아프면 원점이 된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이 든다.
내 몸이 아플 때야 비로소 온전히 춥다는 감각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운 것도 서러운 마음도 없다. 처방전 없이 사온 종합감기약은 근육통과 피로를 잠재우지 못한다. 종류별로 융단폭격처럼 복용해 보지만 어림도 없다. 연휴가 지나고 병원이 다시 문을 연 아침에 B형독감 확진을 받았다. 무보험자인 나는 수액 대신 아침 저녁으로 총 5일에 걸쳐 항바이러스제를 복용하기로 하고 작은 알약 10개를 처방받아 왔다. 금방 나아질 거라는 의사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더 이상 춥지 않은데 주말 내내 이불을 덮고 누웠다. 10일의 관성인지 후유증인지 알 수 없다.
고양이가 떠난 방에 방치되어 있던 캣타워를 분해한다. 미처 돌돌이로 밀지 못한 기둥에는 갈색 털이 묻어 있다. 대형폐기물 신고를 하고 6천원을 결제했다. 낑낑대며 분리수거함 옆에 캣타워를 세워놓으니 길냥이가 와서 쉬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쉼 자체는 환영이지만 자리에 정을 붙이면 폐기물을 수거한 뒤에 황망해지지는 않을까. 그러나 몇 수 앞의 일을 미리 슬퍼하지 말자. 이번에는 창문이다. 방충망에 발톱이 걸리지 않도록 다이소에서 사온 철망 두 개를 떼어내자 비로소 창문 밖이 멀겋고 훤하다. 다 치웠다. 걷어냈다.
다시 눕는다. 고양이를 데리고 간 사람은 돌연 인스타그램 주소를 바꾸었다. 팔로우도 끊어졌다. 이런 이별은 익숙하다. 언젠가 하얀 고양이를 이별과 함께 산 채로 보낸 일이 면역력을 길러주었기 때문일까. 무엇이든 명대로 살고 인연대로 보거나 보지 못한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다. 심지어 내 배가 아프게 낳은 자식도 떠나보낸 엄마의 슬픔은 나의 삶에서 고스란히 되풀이된다. 경험도 유전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 슬픔의 스케일은 단지 고양이라서 축소되는가? 아니다. 덤덤해지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고양이를 죽음 근처까지 배웅한 날, 화장막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고양이의 형태였던 것이 하얀 가루로 돌아올 때마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처럼 마음에 돌멩이 하나를 얹었다.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돌탑을 쌓았다. 마지막 돌멩이 하나는 나의 죽음이다. 절대수명이 짧은 생물을 생각보다 빨리 보낼 때마다 천년을 사는 무언가의 반려생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가는 길에 참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다. 홀로 죽어가면서 끝내 야옹밖에 못했던 야속한 녀석들과는 다르게 떠나고 싶다. 어쩌면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흘려들은 것일까. 불현듯 운다. 뒤늦게 또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