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하지도 착하지도 않은 중고거래

by 써드

무너지면 몰살을 면치 못하는 거대한 댐 아래 사는 사람들의 스트레스 지수는 오히려 댐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마을에 사는 사람보다 낮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되새길 때마다 ‘뭐야, 마치 나 같잖아’ 하고 느꼈는데 이제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물살을 막던 구조물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 위기의 징후가 뚜렷해졌는데, 이제 알음알음 급전을 빌려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지난 며칠간 발악이라도 하듯이 집에서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중고거래 사이트에 내다놓기 시작했다.


물건들은 말이 없다. 그러나 보내는 마음에는 수많은 독백이 이루어진다. 이번 중고거래 행렬에서 가장 속상하고 마음이 아픈 품목은 바로 제습기였다. 조만간 공룡 발자국을 찍듯 짧고 굵은 봄이 지나고 나면 장마가 오고 여름이 올 텐데, 습도가 높은 내 방에서 제습기는 필수다.


“제가 구매할게요. 내일 남자친구 차로 가지러 갈게요.”


메시지를 주고 받고 나서 작년에 구매한 제습기가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을 보는데 어쩐지 매끈한 몸체에 땀 흘리는 비석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해 보인다. 물통이 차면 비워내고 또 다시 결착하는 과정을 반복할 때마다 ‘이 제습기가 없었더라면 가득한 물들이 죄다 공기 중에 습기의 형태로 포진되어 있었겠지’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런데 그런 제습기를 보내려니 필요에 대한 실용적 아쉬움과 더불어 정든 친구와의 이별 같기도 한 섭섭함이 생긴다. 생각해 보니 지난 1차 중고거래 시즌에서는 크로스로 매고 다니는 작은 가방이 그랬다. 가방이야 안 매면 그만이라 후폭풍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제습기는 꿉꿉한 바닥을 느낄 때마다 새록새록 그리움이 솟을 것 같다. 물론 그때쯤 경제상황이 나아져서 똑같은 품번의 제습기를 살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지금의 제습기는 아니지 않은가. 나는 급기야 공산품을 사랑하게 된 것일까.


하늘이 나의 슬픔을 읽었는지 다음날 메시지가 도착했다.


“공기청정까지 되는 제습기를 사려구요. 죄송합니다.”

“네, 괜찮습니다.”


안도감이 들었다. 더불어 공기청정이 되는 신형 제습기가 있구나 싶으면서 제법 큰 주제에 공기청정도 못하는 나의 제습기가 못나고 짠하다. 나는 판매내역에서 제습기 게시물을 숨겼다. 아무래도 이 제습기는 올 여름도 나와 함께 할 운명인 것 같다. 안쓰러운 녀석. 우리 같이 가자 계속.


구매 관련 문의는 많이 왔지만 이상하게 팔리지 않는 물품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스텝퍼다. 1년 전쯤 사면 곧 운동이 시작되리라 믿고 구매한 물품인데 한동안 수납함에 방치되어 있다가 이제야 정리하게 된 것이다. 스텝퍼 신형 트위스터 기능이 탑재된 신형이 출시된 모양인지 구매 문의를 하는 이들 중에는 트위스터 기능이 있냐고 물어보는 경우가 많았다.


“아니요. 일반 스텝퍼입니다.”


이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나서 가격을 두 차례 내린 다음에야 구매를 원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제습기와는 달리 스텝퍼는 어딘지 내 호기와 허영심이 응집된 물품인 것 같아 그닥 안쓰러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하늘색 발판이 고왔는데, 얼른 보내고 싶어하는 내가 혹시 야속하지는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스텝퍼는 의인화를 할 정도로 사물 그 자체에 대한 애착이 떨어진다.


“예정대로 7시에 도착하실까요?”


스텝퍼를 사기로 한 사람 때문에 저녁 산책을 생략하고 부랴부랴 퇴근 후 집으로 왔건만 시간이 7시 5분이 되었는데도 연락이 없다. 나는 다시 구매자와 나눈 메시지를 훑어보며, 분명 저녁 7시로 얘기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은은하게 짜증이 치밀었다.


“8시 안에는 도착할 것 같아요. 출발은 했어요.”


메시지가 도착했다. 또 다시 마음이 부글거린다. 대체 어느 행성의 시간관념인가. 나는 아쉬운 소리를 할까 하다가 아직 입금이 되기 전이라는 잔인한 진실 앞에 다시 침착함을 되찾았다. 당연히 자차로 올 줄 알았는데 구매자가 또 한 번 이상한 소리를 한다.


“들고 갈 수 있도록 싸주시는 거죵?”


거죵? 나는 또 한 번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은 마음으로 메시지를 작성하다가 말았다. 구매자는 지하철을 타고 오고 있다고 했고 나는 도착 5분 전쯤 제법 튼튼한 리유저블 가방에 스텝퍼를 담아서 집 앞으로 나갔다. 입금이 되기만 하면 어플에 이 사람의 황당한 시간관념을 낱낱이 밝혀 매너평가를 최악으로 해버리겠다는 마음이었다. 잠시 후 설렁설렁 걸어오는 앳된 여성이 입금 완료가 된 휴대폰 화면을 보여준다. 나는 스텝퍼가 담긴 가방을 건넸다. 방에 돌아오니 어플에서 ‘OO님과의 거래는 어땠나요?’ 하고 알림이 뜬다. 나는 벼르고 벼른 대로 몹시 심한 평가를 하려다가 구매자의 앳되고 얼빠진 얼굴이 떠올라 평가 자체를 미루었다. 그래, 내가 그렇지 뭐. 독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착하지도 않다.


드라이기부터 가죽자켓, 스텝퍼까지 일련의 물건들이 내 방을 빠져나가고 나는 급기야 내 첫사랑의 아련한 기억을 팔 순 없을까 하고 생각한다. 행여라도 우리 몸에서 없어도 되는 장기는 없을까. 50회 이상은 빨아서 입은 팬티를 팔아도 되는 것일까. 나는 혹시 점점 미쳐가고 있는 게 아닐까.


“괜찮아. 내가 있잖아.”


어디선가 민트빛 후광을 두른 채 제습기가 말을 건다. 그래. 어쩌다 보니 공기 청정은 못하지만 습기는 제법 잘 빨아들이는 제습기를 지켰다. 지켜도 팔아도 턱없이 쪼들리는 상황인데, 그래도 이 상황에서 단 하나의 위로라면 바로 저 녀석이다. 참으로 잔인한 봄의 초입에 터널의 끝은 요원하고 도로는 실선으로 정비되어 차선을 변경할 수도 없다. 일단 가자. 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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