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삶을 씁니다. (열한 번째 이야기)
매해 어김없이 유난스럽게 보내고 싶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는 날은 다른 날과는 다르게 보내고 싶었다. 연초에 세워둔 목표를 돌이켜보고 (대부분 못 이룬 것들이 주를 이루지만) 또 다른 설렘으로 새해의 목표를 하나둘씩 세워가고, 고마운 이들에게 한해 수고했노라고 안부 인사를 전하고, 가족들과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고, 새로운 다이어리를 마련하고, 새해 탁상달력을 펼치고, 새롭게 맞이할 내 나이를 곱씹어보고... 소란스럽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한 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12월 31일과 1월 1일의 내 일상은 이 정도의 유난스러움으로 늘 채워왔다. 그래야 한 해가 마무리되는 것 같았고, 그래야 새해를 맞는 기분이 났다. 하루가 흐르는 건 같지만 그 하루 사이에 해가 바뀌고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날이니까 이 정도의 유난스러움은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는 뭔가 좀 다르다. 나이를 먹어서일까. 일상이 달라져서 일까. 늘 조금씩은 유난스럽던 나의 연말이 올해는 차분하고 평온하게 흘러간다. 해가 떠서 시야가 밝아지면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바깥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남편과 함께 미리 장을 봐 둔 밀키트 음식으로 점심을 차려먹을 테고, 중간중간 바삐 몸을 움직이며 집안일을 할 것이고, 텔레비전에서 전해주는 연말 분위기를 느껴보기도 할 테고, 저녁이면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새해 인사를 전할 것이다. 별다를 것 없는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일은 거실 창으로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적당한 날을 보내고 맞지 않을까.
유난스럽게 설레던 마음이 올해는 찾아들지 않았다. 그저 잘 지내야지, 평온하게 하루를 살아내야지,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소박하게 잘 보내야지, 내 곁의 사람들에게 날카롭게 굴지 않고 부드럽고 온화하게 마음을 건네야지, 새로운 만남이 주어진다면 그 만남에도 충실해야지, 내 앞에 주어진 내 몫의 일상을 잘 만들어가는 것. 이 정도의 바람을 마음에 품고 한 해의 마지막 날 그리고 새해의 첫날 앞에 서 있다.
늘 대여섯 가지씩 되던 목표나 바람, 꿈같은 게 올해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다이어리 첫 장에 기록해두던 ‘올해의 목표’는 빈칸이 될 것 같다. 그저 마음도 일상도 적당히 평온했으면. 딱 그 정도의 바람만 안고 12월 31일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