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here and now)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살아보니 '버터 내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가만히 곱씹어 보면 맞는 말이다.
학창 시절 고난의 고3을 견뎌내면 드디어 자유를 얻는 성인이 된다고 여겼던 때가 있다.
실컷 술 마시고 늦게까지 친구들과 놀고, 미칠 것 같은 설렘의 사랑도 해야지....
그렇게 부품 마음을 안고 대학을 갔지만, 사실 그 보다 시간의 많은 파이를 차지하는 것은
쌓인 과제와 취업의 문턱을 어떻게 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었다.
매일 해결되지 않고 하나둘씩 산적하는 인생의 과제들을
나 또한 온몸으로 맞서며 고군분투했었다.
참 슬픈 이야기이지만, 노력은 때론 우리를 배신하기도 한다.
나는 원치 않게 점수 맞쳐 간 대학 4년 내내 분노에 차 있었다.
그건 고3 때 열심히 했지만 성적이 배신했다 여겼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런 결과를 낳은 나 스스로에 대한 무한한 불편이기도 했다.
난 과에서 유명한 '학교 도서관 지박령'으로 살며, 꼭 이 분야에서 성공하리라 다짐했었다.
내 꿈을 위해 좋아하는 사람이 방해된다 생각돼 그의 마음을 내치기도 했었고,
도움이 된다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을 포섭해 지식을 알아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발버둥이 현재의 내 위치를 갖게 해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노력하고도 이렇게 평범한 일꾼이 되어버렸나 싶기도 해 허탈하다.
치열함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그리고 인생의 어둠 속 길을 잃었다 착각하게 한다.
어른이 된 지금도 치열하게 살지만 '내가 지금 잘 버티며 살고 있는 것인가'를 늘 묻게 한다.
얼마 전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었다.
1년 넘게 매일 같이 씩씩대고 술로 풀고, 괜한 내게 화를 내기도 했다.
모두 직장동료들에게 느끼는 누적되는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버텨'라고 이야기했었다. 나중에 후회한다고.
다른 데 간다고 똑같은 스트레스를 겪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그러나 남편은 머리까지 차버린 분노와 무력감에 사표를 냈다.
'쓰레기 같은 동료들도 버티는데, 왜 당신 같이 노력하고 애쓰는 사람이 고통스러움을 느끼며
밥벌이를 그만두려 해!'
한 동안의 냉전은 '존버'하지 못한 남편에 대한 속상함으로 채워졌다.
하지만 돌아서서 생각하니
남편이 직장에서 과거부터 켜켜이 누적되어 온 스트레스에 매몰되어 현재를 살기보다는,
살아나가야만 하는 다음의 삶을 위해 '존버'하고자 최후의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버텨야 되는 것은 단순히 직장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가운데에서 '늘(always)'인 것이다.
상담심리를 공부하면서 가장 기본으로 가져야 할 마인드가 "here and now(지금 여기)" 관점이다.
과거의 부정적 경험과 감정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현재'의 감정과 생각에 집중하도록 하여
현실에서 버틸 힘을 스스로 성찰하도록 돕고,
미래의 걱정에 목매는 사람들에게 '현재'를 온전히 살아 미래의 두려움을 상쇄하도록 하는 것이다.
실제 환자분들을 상담할 때 나 또한 이를 중점적으로 되새긴다.
누구나 현실의 냉혹함에 힘듦을 느낀다.
그렇다고 과거의 나도, 미래의 나도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린 언제나 늘 힘들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과거에도 미래에도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할 것이라 여긴다고
현재의 당신 자신까지 잃어버릴 정도로 녹아내릴 필요는 없다.
오늘도 상사의 핵 사이다맛 지적에 지쳤을 것이다.
동료들의 핀잔과 일 떠밀림에 혼자만의 야근이 억울할 수 있다.
고객들에게 난 최선을 다했지만 그들은 나에게 최악을 주기도 했을 것이다.
주말 없는 일상의 매너리즘에서 내가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 이러고 있는지
가닥이 잡히지 않을 수도 있다.
어른은 이렇게 모든 삶을 참아야 되는 것인가, 그게 '존버'인 것인가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존버'는 "here and now(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며 현재를 살아가는 것.
가끔은 내 존재가 일상 곳곳의 잔혹함에 흐릿해져도
스스로 잘 버티고 있음을, 그것 만으로 잘 살고 있음을 토닥거려 주길 바란다.
그림 출처(위키백과): 에드워드 호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