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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카리 Jan 15. 2023

2. 사업

고등학교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J와 나는 이 지루하지만 매일 수행해야 했던 우리의 역할에 전혀 의도치 않은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대단할 것은 없었다. J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갑자기 키가 부쩍 자라버렸다. 키가 187cm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덩치도 같이 커져서 그를 괴롭히던 친구들이 귀엽게 다룰 수 있는 덩치가 되어버렸다.


나는 이른바 '수능형 인간'으로 학교 선생님들이 그 들만의 모범생들에게 어떠한 방법으로도 문제를 공유하지 못하는 전국단위 모의고사 성적이 수직상승 하면서(어쩌면 전국단위 모의고사의 문제를 공유 받는 사람들은 더욱 소수라서) 선생님들이 마땅치 않지만 지켜야 하는 보호종 비슷한 게 되면서 뒷자리 아이들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우리가 생태계의 사슬에서 빠져나오자 그곳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남학교의 정글 같은 생태계에서 먹이사슬이라는 차꼬가 어느 순간 벗어지며 생태계를 벗어난 우리는 맹수의 이빨이 안 박히는 갑옷을 두른 천산갑처럼 우리는 사춘기의 폭력이 낭자한 정글을 산책하며 좋아하는 것들을 탐닉했다. 그리곤 혹시나 그 곳으로 끌려갈까 두려워 몸을 부르르 떨곤 했다. 


새로 얻은 자유의 시대를 맞이하여 J는 음란물과 밀리터리물을 모으며 그의 자유로움을 과시하고 있었고 나는 내면의 어두움을 닥치는 대로 독서를 하며 불사르고 있었다. 비록 우리가 서열을 확인하는 데에서는 벗어났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서열이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갖게 된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할 권리를 정말로 소중히 여겼다. 서열이 높던 낮던 우리는 그들과 동등하게 우리의 취향에 대해 공유하고 때로는 그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이런 변화가 마음에 들었고 다시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에게 이 권리는 강한자들에게 맞지 않은 권리였고 생태계에서 우리의 역할을 인정받을 자존감이었다.


J는 탐닉하던 음란물을 시청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유통업을 하는 것을 구상하게 되었다. 지금과 달리 용산의 전자 상가에는 그때 까지만 해도 느슨했던 지식재산권의 시야를 피해 온갖 불법 복사 프로그램과 영상들을 팔았다. J는 대담하게도 용산에 진출하여 그 시절 속칭 '골드시디'로 불리는 이런 불법 복제로 ‘CD를 구워’ 파는 곳을 알게 되었다. 그 CD에는 온갖 불법 복제 게임들과 일본 음란물들이 들어 있었다. 용산의 아저씨들은 그래도 양심이 있게(?) 고등학생들에게만 팔았고 J는 그의 성장해버린 외모를 이용해 아직도 부모님의 과잉보호의 우산 아래, 모험심 부족과 정보 부족으로 새로운 세계로의 탐색을 못한 나와 다르게 주말이면 용산에 가서 그 번쩍번쩍 빛이 나는 '골드 CD'를 사왔다.


J의 이런 사업가적 기질은 약간 문제점이 있었는데 J가 아직은 왕따의 후유증으로 대인관계가 그렇게 원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무도 눈치 못 챘지만 친했던 나만 눈치를 채고 기억을 했던 것일까? 그는 판매망을 같은 반에서 다른 반으로 넓혀가던 중 판매책으로 나를 발굴했다. 나는 앞자리의 아이들과 뒷자리의 아이들도 친했고 선생님들에게 비교적 의심을 덜 받는 부류여서 안전하게 CD 샘플 사진들을 보관하고 판매된 CD를 전달할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판매 목록을 보내 주었고 우리반 아이들에게 주문을 받았다. 그 당시만해도 모뎀으로 수영복 사진 한 장을 5분 걸려서 받던 시절이 였기 때문에 '성진국' 일본의 650MB의 동영상은 그야 말로 도포 입고 글 읽던 선비들이 인천 앞바다에 뜬 이양선의 대포소리를 들은 것 과도 같은 혁명적인 반응을 일으켰을 무렵이었다. 사춘기에 이성과 유리되어 있는 환경은 성장기 폭발하는 호르몬의 영향을 받던 많은 남자 아이들에게는 고문과도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학교의 서열이 어떻든 공부를 잘하던 못하던 그들은 J를 필요로 했고 J와 연결되어 있는 내가 필요했다. 


가끔 서열이 높은 아이들은 원하는 물건을 구하지 못하면 예전처럼 거친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비굴해 지며 언제쯤, 어느 정도 가격에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영상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를 물었다. 물론 이 사업도 얼마 지나지 않아 초고속 인터넷이 전국에 보급되면서 경쟁력을 잃고 사장되어 갔다. 하지만 우리는 생태계에서 서열을 인정 받는 것을 넘어 공부를 잘하던 서열이 높던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갈망하며 쩔쩔매는 모습을 보며 무엇인가 한커플을 열어 나약한 알몸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사업을 같이 하며 우리는 곧잘 어울렸고 곧 우리가 같은 어두움을 지니고 있고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이에나와 사자들이 싸우는 초원의 권좌에서 멀찍이 떨어져 정글 속에 사는 티몬과 품바처럼 우리는 썩은 나무 밑을 뒤지며 통통한 벌레들을 뒤져 잡아먹듯이 음란물을 평가하고 게임을 하고 J는 칼과 밀리터리물을 모으고 나 역시 만화책과 게임들을 탐닉하며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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