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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카리 Jan 02. 2023

1. 생태계

청춘이 연주하는 음악에 맞추어 각자의 춤을 추던 우리들의 이야기



"내 친구 J에게, 너에게 이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다시 노래하며 술잔을 나누고 싶다. 그날이 오길 기원하며…"




이 이야기는 소설이며 여기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허구의 인물들이며 허구의 사건들이다. 혹여 실제 일어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나의 과장과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를 합친 농담과 호들갑이다.



우리의 귓가에 청춘이라는 DJ가 음악을 들려주기 시작 할 무렵 세상은 이미 한세기를 끝내고 있었고 두 번 째 천년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세상은 나이를 그렇게도 많이 먹었지만 우리에겐 청춘은 처음이라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던 해에, 세상은 밀레니엄 버그로 멸망할 것이라고도 했고 이탈리아의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유명한 예언가 아저씨는 하늘에서 무서운 앙골모아 대왕이 내려와 세상이 망한다고 했다.


하지만 새 천년이 다가온 후에 달라진 것은 우리의 나이 뿐 이었고, 하늘이 무너지지도 핵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우리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몇 억 번을 돌았는데 왜 하필 이번 이천 번째가 특별해서 세상을 끝내겠냐며 허세를 떨었다. 하지만 정작 겨우 두번째 십년을 보낸 우리들의 청춘의 시간을 맞이하며 그 시기를 세상에 그 누구도 겪어 본적 없는 상처처럼 아파하며 또, 그 어떤 축제보다 더 흥겨운 축제처럼 지냈다.




빼앗겨 보지 않은 권리는 그 가치를 알 수 없다.


누군가를 만난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면 기억 속 저편에 안개처럼 흐려져 그와 함께한 시간들이 마치 꿈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함께 웃고 울던 그 때에는 정말로 생생했던 것 같은데 어쩌다가 이렇게 만났다는 사실조차 가물거리게 된 것일까? 예전에 친했다가 연락이 뜸해진 사람들이 재회하면 새로 만든 추억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과거의 얘기들 만을 반복한다.


하지만 만나지 않는 시간이 점점 길어질수록 그 사람과의 시간을 떠올릴 때 나타나는 뿌연 안개가 점점 더 늘어나게 되고 마모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오래된 석탑의 무늬처럼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가물가물 해져버리는 것이다. J는 자신이 그렇게 잊혀지는 것을 누구보다도 싫어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J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영화에서 보던 전투기 이름을 떠올렸다. 90년대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재단(나중에 도가니라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재단과 같은)에서 운영하는 비리의 온상인 건물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다. 그와 같은 동네에 살면서 같은 중학교를 나왔지만 서로 얼굴만 알고 지내다가 고등학교를 같이 가게 되어 친해졌다.


학교 입학 예비소집을 하고 돌아가는 길에 그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중국집이 있었고 그의 부모님의 중국집에 들러 밥을 얻어먹었다. 월식을 받는 중국집이라는 곳을 처음 가봤다. 중장비들의 먼지로 뒤덮인 아파트 공사장 단지 사이 공터 풀밭 위에 가건물로 임시로 지은 식당은 장식이라는 것은 최소화하고 오직 가격에만 신경을 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메뉴가 써 있는 시트지로 햇빛을 막은 창문 겸 입구를 열고 들어서자 민트색 페인트 칠을 한 의자들과 식탁에는 비닐 덮개가 씌워진 식당이 나타났다.


“J왔구나! 전화라도 하고 오지! 오마나 친구도 같이 왔네? 그래 학교에서 여기까지 그냥 걸어왔어?”


J의 어머니가 주방에서 나오면서 반겼다.


학교에서부터 근 한시간을 걸어왔기 때문에 점심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나름 이 식당에서 가장 귀빈들이 올 법한 칸막이가 있는 방으로 인도되어 밥을 먹었다. 칸막이에 빼곡히 마치 외국 거장 화가들의 그림처럼 꽂혀 있던 성인 비디오들에 눈에 갔다.


오늘 점심에 나갔던 모든 재료들과 주문 들어온 모든 중국 요리가 조금씩 담겨 나오는 식사를 대접 받았다. 볶음밥용으로 깔깔하게 혀안에서 돌던 밥을 먹었다. 중식집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나물이고 국에서도 중국집 불 맛이 나는 것 같았다.


하얗고 건포도가 박혀 있는 새참용 빵을 후식으로 받아 베어 물었다. 백설기라고 했지만 카스텔라처럼 소복한 느낌에 건포도가 박혀 있던 빵의 달착지근한 맛이 아직도 입가에 맴돈다. 사진처럼 각인된 그와의 첫 기억이다. 수십년이 지나 기억들이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져 가는 와중에 왜 그 순간의 기억, 느낌 맛은 생생히 남았을까? 나는 알 수 없는 무의식이 선택하는 기억의 기준을 그저 통보 받은 그대로 간직한다.


J와 나는 성격상 비슷한 점이 많았다. 좋아하는 것도 비슷했다. 우리는 온갖 음모론에 심취해 있었고 혈기 왕성한 고등학생 답게 범람하는 일본의 음란물들을 탐닉하고 있었다. 또 '칼'과 '밀리터리'라는 이상한 곳에도 꽂혀 있었다. 우리는 금새 등하교 길에 그리고 쉬는 시간에 붙어 다니며 성장기의 호르몬들을 거침없이 뿜어 냈다. 우리가 이렇게 각기 다른 이상한 곳에 꽂혀 있으면서도 성격이 비슷했던 배경은 성장기의 배경이 비슷해서 아닐까 추측해 본다.


J는 어린시절부터 키도 작고 덩치도 작은데 남들이 보기엔 엉뚱한 상상에서 나온 소리를 잘 했기 때문에 그 시절에는 늘 그랬듯 왕따를 당했고 학교 폭력의 대상자였다.그 당시만 해도 남녀 공학은 드물었고 우리가 진학 한 남학교는 내가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본 콩고 정글의 고릴라 무리와 닮아 있었다.


한곳에 모인 수컷들은 먼저 서열을 정하여야 했고 학년이 바뀌거나 학교가 바뀌면 한바탕 폭력이 수반된 사건들을 겪으면서 서로의 지위를 확인했다. 그리고4월쯤 이 되어 생태계의 서열이 정해지고 다같이 봄소풍을 다녀오면 생태계의 불안정은 해소되고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며 평화로운 1년을 보내게 된다.


J와 내가 부여 받은 역할은 생태계의 가장 낮은 계급이었다. 남학교는 쉬는 시간마다 교실 뒤편에서 운동회가 열리고 복도에서는 방향이나 룰이 모두 제각각 인 달리기 대회가 열린다. 이 자신들만의 운동대회에 참가 자격이 있는 친구들은 신체적인 서열을 검증 받은 친구들이었다. 그 외에 다른 계급들은 책상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 어제 한 게임 얘기나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토론을 하며 풀을 뜯는 톰슨가젤과 같은 평화로움을 보인다.


하지만 맹수들끼리 서열 정하기가 끝나고 우유곽으로 하던 농구가 실증이 나면 사자나 치타와 같은 아이들은 ‘톰슨가젤’이나 ‘누우’떼 같은 우리들의 무리에 한번 뛰어들어 사바나의 모습을 재현해 보려 했다.


어쩌다 우유곽 농구공이 우리 쪽으로 튀었거나 아니면 그냥 심심했을 것이다. 놀이는 간단하다. 한 명이 이유 없이 가만히 있던 사람을 한 대 치거나 침을 뱉거나 먹고 있던 음식을 뺏어서 도망가는 것이다.


그러면 당한 쪽은 때린 쪽을 열심히 쫓아가서 잡아서 자기가 당한 만큼 복수를 해주고 다시 도망을 간다. 이 놀이는 정글의 작은 이벤트이기 때문에 쫓기는 역할이 될 경우에는 비록 자기가 아무리 서열이 높더라도 반항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상대방이 적절한 복수를 한 뒤에 다시 그를 쫓아가며 암묵적인 룰에서 인정하는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런 아무도 승자가 아닌 쫓고 쫓기는 행위는 분명히 미친듯이 분비되는 남성호르몬과 사냥 본능의 발로다. 나 역시 쫓는 자의 역할을 수행할 때 내가 쫓던 상대를 추격해 쓰러트리고 팔뚝 같은 곳을 몇 대 때릴 때 뿜어져 나오는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쫓기는 역할이 되어 복도를 질주하며 나와 같은 역할을 하는 많은 친구들을 피해 달리고 도망칠 때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이 의미 없는 호르몬과 쾌감의 확인은 수업이 시작되고 선생님이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우리들의 정글에 밀렵꾼 혹은 국립공원 관리자와 같은 선생님들이 저 멀리서 모습을 나타내면 미어캣이나 독수리의 역할을 맡은 친구들이 발을 구르거나 ‘삐이익’하고 울어서 경고를 주는 대신 “떴다”하고 경고를 주면 모든 경기가 중단된다. 그제서야 모든 쫓고 쫓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복수극도 종료가 되고 우리의 작은 사바나, 콩고 열대우림은 자욱하게 뜬 먼지를 뒤로 하고 정적에 빠져든다.


아마도 인류가 무리를 지어 사냥을 하게 된 뒤로 수천년 동안이나 이어져 왔을 의식을 우리들도 수행했다. 이 의식은 어찌 보면 누구나 역할을 주고받으며 평등한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나 강자들은 자신들의 우월한 지위를 확인했다.


예를 들어 쫓기는 자의 역할을 하다가 갑자기 자기의 성질을 못이기고 역할을 벗어 던지고 쫓는 자를 무참하게 패 버리는 사건이 일어나거나 우유곽으로 하던 경기 중에 반칙을 했다며(애초에 우유곽을 문틈사이에 던져 넣는 농구 대회에 룰이 있을 리가 없지만) 한 명을 무참하게 밟는 사건이 나기도 했다.


이런 경우에는 당하는 쪽은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자신을 보호하며 정글의 룰의 수호자들을 기다린다. 그러면 어느 정도 정글의 서열을 가지고 있는 중계자들이 나타나 “왜 그래? 잘 놀다가” 하면서 말리면 “하... 열 받게 하고 이 새끼가... 야 아프냐?” 하면서 툭툭 치면 낮은 위치의 아이들은 “아 너가 먼저 쳤는데!” 하고 그가 정글의 룰을 어겼음을 만방에 선포하면 그도 멋 적은 웃음 지으며 끝나곤 했다.


하지만 이런 작은 이벤트도 대상이 최하위계급에 있거나 왕따였던 아이들에게 그런 일이 발생하거나 아니면 서열이 높은 아이가 지나치게 오늘 따라 어디 다른 일로 기분이 나빴다면 다른 양상으로 흘렀다. 공수 전환이 이뤄지지 않고 일방적인 폭행이 계속되거나 아예 그 애를 괴롭히는 것이 하나의 놀이처럼 되어 모두가 구경하는 일이 일어났다. 또, 중재자들이 나서서 말리지 않고 다들 구경만 하거나 희생양이 왕따일 경우는 다른 약한 아이들까지 그때만은 우월한 지위를 느껴 보고 싶은 듯 때리는 쪽에 가담하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나는 J가 우유곽 농구를 하다가 교실 바닥에서 밟히면서 초점 없는 눈동자로 바닥을 보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가 쫓다가 돌아선 친구에게 깔려서 얼굴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닿았을 때, 눈만 간신히 돌려 바닥에 깔려 있는 나를 바라보는 J와 눈을 마주치고 서로의 눈을 피하곤 했다. 우리는 우리 보다 더 약한 아이들이 명백하게 억울한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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