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지적 호기심이 매우 강했지만 시험을 잘 보는 재주는 없었기 때문에 입시에 실패하였다. J에게 물려준 사업가적 기질을 가지고 있던 J의 아버지는 그 당시만 해도 이제 막 문호를 연 중국에서 새로운 기회를 포착했고 한국의 입시에서 실패한 그를 중국의 대학에 보내면서 나와 그는 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서울로 대학을 오고 그가 중국으로 유학길을 떠나기 전까지도 가끔 J가 서울에 와서 우리의 기괴함을 공유하는 인연은 끊이지 않았다.
나 역시 시험 성적은 운이 좋았지만 대학교 진학에는 운이 따르지 않아 어린 마음에 꿈꾸던, 힘과 권력을 얻어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만 같던 그 환상 속의 학교에는 가지 못하였고 길을 잃고 방황을 하게 되었다. 그 방황을 핑계로 술과 나태의 늪에 빠져 살았다. 집안에서는 내가 그렇게 나태하게 지내다 취업이든 뭐든 사회에 써먹지 못하게 될 것 같아 보이자 대책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나는 내가 남들과 다르게 인생을 주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야망을 가지고 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는 시키는 대로 입시준비 공부를 하고 남들과 다르게 독서를 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목표가 좌절되자 그렇게 탐닉해서 보던 만화책, 소설에서 불굴의 의지로 난관을 돌파하던 주인공들과 다르게 나는 그저 그런 타협을 하게 되었고 난생 처음 ‘그래서 결국 뭘 해서 먹고 살 것 인가’에 대해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어영부영 지내다가 대학 입시는 물론 어렵게 들어간 학교에서 학점 미달로 전공 선택까지 실패하여 집에서 당장 짐 싸 들고 내려와 삼수를 준비하라는 불호령을 피할 궁리만 하던 나는 "그래도 중국어 같은 언어를 하나 하면 경쟁력이 있지 않겠냐"는 역시 연락이 이제는 끊어진 다른 친구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진로를 급 변경하였다. 방금 만들어낸 호구지책이었지만 집에다가 마치 고심해서 세운 계획인 것 마냥 당당하게 내가 언어를 배워서 먹고 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방법이 막막했고 나는 그렇게 추진력이 좋은 성격이 아니었다. 소리바다로 MP3를 다운받고 버디버디로 이방 저방을 돌아다니며 울분에 찬 채팅을 하였다. J는 그런 나의 사정을 듣더니 "내가 여기 어학원 등록해 줄께" 라고 제안하였다. 나는 그말을 듣자마자 중국에 유일한 아는 사람이던 J가 모든 것을 알아봐 준다는 것만 믿고 결국 나는 중국 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아무것도 조사 하지 않고 그저 J가 알아봐 준다는 것만 생각하고 출발했다.
친구들과 술자리 여자친구와 눈물의 이별을 하고 상해가면 연락을 하겠노라며 신파극을 찍고 눈물을 머금고 공항으로 향했다. 하지만 공항에 도착해서 비자 없는 여권을 내밀고 공항 직원 누나의 황당한 눈빛을 받으며 캐리어를 끌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어색한 재회를 다시 했다. 그리고 며칠이나 걸려서 다시 비자를 받아 이번에는 조금 밍숭밍숭한 이별을 뒤로 한 채 비행기를 타는 해프닝을 격고서야 중국으로 떠났다.
할 줄 아는 중국말이라곤 "안녕하세요?", "날씨가 참 좋네요" 이 두 마디 이던 나로서는 참으로 대책 없고 준비 없이 뗀 한 걸음이었다. 그렇게 중국과 얽힌 나의 인생이 시작되었고 J와 나는 티몬과 품바처럼 다시 붙어 다녔다. 새 천년을 시작하고 있는 중국은 마치 처음 만났을 때의 J와 나처럼 은둔의 장막을 벗어나 개혁개방 이후 발전의 속도에 휘청거리는 사춘기의 상태와 같았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급속 발전하던 그 중국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나는 막상 중국에 도착한 그 첫번째 관문인 공항에서 어떻게 수속을 마치고 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당시만 해도 어느 테러 분자들이 미국의 항공기를 탈취하여 민간인들이 가득 찬 빌딩에 자살 테러를 한지 얼마 안되었지만 비행기 보안 강화의 여파는 닥치기 전이었다. 그래서 공항 수속은 지금보다 훨씬 간단했다. 짧은 수속이었지만 그래도 정신이 없이 흘려 보내고 기억나는 것 이라고는 어찌어찌 헤쳐 나와 출구 건너편 이층에서 J를 발견했을 때부터 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마치 자기의 몸을 이제 막 처음 움직여 보는 것처럼 어색한 몸짓으로 ‘여어~’ 하며 90도로 팔을 세워 인사를 하고는 기쁘다는 웃음을 얼굴에 띄운 채로 8자 걸음으로 어정어정 뛰어내려 오던 기억부터 내 중국 생활의 첫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