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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카리 Feb 05. 2023

6. 증거

나의 첫 중국 환영식이 끝나고 며칠 뒤 J는 마치 예전부터 내 방에 찾아오기라도 했다는 듯이 내 기숙사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J는 중국에서도 여전히 그의 특이함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고등학생을 벗어나고 가끔 MSN 메신저를 지나 네이트온으로 연락을 주고받기만 한지 1-2년이 지났다.


그 사이 법적으로 성인이 되고 주거를 독립하고 한참이나 지나서 만난 우리들은 그동안 발전시킨 우리의 권리인 특이함에 대해 확인했다. 그는 '살아있다'라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J는 계속해서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려 했다. 살아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하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살아있음의 증거를 찾는데 몰두를 하고 있었다.


J와 나는 살아있다는 증거에 대해 또, ‘이 세계가 진짜 존재하는 세계인가 아닌가?’에 대한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정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대로 세계는 1999년에 멸망해 버리고 우리들은 그저 사이버 세계에 남겨진 존재라면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는 무엇일까?


그때 한창 우리가 빠져서 읽던 이세계물 만화책처럼 우리가 정신 차려 보면 이 세상에서 모험을 끝내고 이 세상은 그저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고 깨어보니 새로운 세상이 된다고 해도 어떻게 알 것인가? 그리고 그와 내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모든 인터넷 커뮤니티의 시작점인 모든 나쁜 문화와 좋은 문화의 근원이던 인터넷 DC inside에 반쯤 미쳐버린 누군가가 반복적으로 남기던 '우리가 통속에 든 뇌라면 어떤 미친 과학자가 전기로 자극을 주고 있는 것이라면?'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그런 꼬리를 물던 어린 우리들의 고민에서 J가 찾은 살아있음의 증거는 폭력과 성이었다. 그는 누군가를 때릴 때 그리고 맞을 때 신경계를 타고 흐르는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강한 증거를 느꼈다. 그것은 그에게는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실재하는 명백하게 느껴지는 증거였다. 상대방의 주먹이 J의 몸에 닿아 고통을 느낄 때 그는 이성의 의문을 가질 새 없이 살아 있는 몸뚱이를 느꼈다.


"나는 이제 친구로 만난 사람보다 주먹으로 때린 사람이 더 많다."

"대단한데?"

"걸어가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랑 다 상상의 공방을 주고받고 있다. 가상으로 대련을 해봐"

"피곤하게 산다. 그래서 다 이겨?"


네이트온 너머로 나에게 말했을 때 참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한참 뒤에 일본만화의 대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 없이 연습한 동작이 반사적으로 상대방의 방어를 뚫고 그의 몸에 주먹이 닿을 때 J는 상대방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무엇에 대한 의심을 할 새도 없이 자신과 상대를 느끼는 그 순간을 J는 살아있다는 증거로 생각했다. J는 중국에서 매일 자신을 단련하며 대학생보다는 무도인에 가까운 자세로 살고 있었다. J는 살아있다는 이 감각을 느끼면서 거기에서 자신이 나아갈 길 또한 무도의 길로 정한 모양이었다.


"격투기를 하면 나는 살아있다는 걸 느낀다. 격투기를 하면 나는 살아 있을 거고 잊히지도 않을 거야."

"잊히지 않는다고?"

"악플보다 서러운 게 무플이고 어그로 보다 싫은 게 무반응이지 나는 살아있는 걸 증명할 거야"

"차라리 은행을 터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그건 살아있다는 느낌이 없잖아"


이런 하나마나한 얘기들을 메신저를 통해 새벽까지 하던 우리들은 사실 언제나 그 나이 때의 가장 큰 관심사인 사랑과 연애 그리고 성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짝사랑 전문가였던 나에 비해 J는 아직 그 어떤 이성에 대한 경험도 없었다.  하지만 중국에 간 뒤로 J는 나름의 분야에서 많은 진전을 이룬 듯해 보였다.

 

메신저 너머로 J가 전해온 사랑대한 방식은 삶에 대한 증거를 찾는 방식과 비슷해 보였다. J는 누군가와 사랑을 나눌 때 살아있음을 확신한다고 하였다. 사랑의 감정은 거절할 수 없이 찾아왔고 붙잡을 수 없이 떠나갔다. 사랑의 감정이 찾아올 때 J는 그 감정이 북받쳐 올라오는 것을 통해 살아있는 자신을 느꼈다. 사랑으로 살아있음을 느꼈지만 이 사랑이라는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감정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사랑의 대상을 그의 신체 감각으로 느끼는 것 말고는 찾아낸 것이 없었다.


J는 손을 뻗어 잡을 수 없다면 사랑 역시 살아있지 않는 이제 죽어 버린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주먹을 맞을 때 반사적으로 방어를 하고 반격을 하는 것처럼 J는 자신의 앞에 사랑이 다가오면 망설이거나 재보지 않고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J는 사랑의 감정과 성애의 감각을 구분하지 않았다. 음란물을 보는 것만으로 살아있음을 확인하던 고등학생, 대학생 처지에 비해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가 없었다. J는 이렇게 살아 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매일 땀 흘리며 상대를 때리고 맞고, 사랑을 하고 있다고 했다.

 

J에게 나의 근황도 전했다. 나는 그때 사랑과 먹고살기에 몰두해 있던 조금 많이 시니컬한 20대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며 가끔 싸이월드에 괴상망측한 글을 올리고 다음날 지우기를 반복하는 매우 평범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매진하던 J와 같이 나 역시 감각으로 느껴지는 그가 말하는 이른바 ‘살아있다는 증거’들을 생생하게 받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J가 느끼는 그런 원초적인 증거들과는 다른 조금 더 고야한 증거들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고, 그런 차이점들은 우리 둘이 비록 교실 바닥에 같이 뒹굴었지만 나는 조금 더 고차원적인 체험과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 역시 귓가에는 청춘이 언제나 음악을 울려 대고 있었다. 그 음악의 리듬에 따라  나는 때로는 진지했고 문득 외로움에 사무쳤고, 갑자기 신이 나 춤을 췄다. 신체는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고 끊임없이 생각들이 머리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나는 이런 증거들을 거부하고 싶었고 즐기면서 후회하고 쫓으면서 도망가고 싶었다. 그냥 그저 좌절된 어린 시절의 꿈과 깨어져버린 첫사랑 뒤로 이렇다 할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일단은 외국어를 하나 배워보자 그리고 눈앞에 닥친 것들부터 하고 보자는 생각을 하며 표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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