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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카리 Jul 03. 2023

여초 회사에서 살아남기

이 층에 남자는 나 혼자라고?

몇 년 전까지 여초회사에 다닌 적이 있다. 최초 입사는 그럭저럭 성비가 반반이었지만 인사발령을 하다 보니 어느 시점에는 1:10의 성비 거나 아예 한 층에 나 혼자 남자였던 시절을 보냈다. 그런 시간들에 에피소드를 엮어서 소개해 본다. 

이 글은 남성과 여성의 성별의 특성을 쓴 글이 아니라 여러 시기에 경험한 일을 통합해서 엮고 또 특정 회사에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일부 사실에 기반했지만 대부분 꾸며내고 과장한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이고 특수한 상황을 엮은 그저 흥미 위주의 일화로 읽기를 바랍니다.


- 17층 남자 화장실 키는 나에게


발령이 난 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을 열었을 때 '앗 이곳은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남초 회사인 전 회사와 남녀 성비가 적절하던 전 부서와는 다른 여성 부서라는 것을...


사실 발령 전에 프로젝트를 하러 뻔질나게 이 층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처음 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짐을 아예 꾸려서 가는 것은 나에게도 또 다른 도전이었다. 처음 프로젝트를 하러 올 때도 그랬다. 문이 열리자마자 모두가 나를 바라봤다. 내가 잘생기거나 매력적이어서가 아니다. 이곳에 올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키의 주인이 드디어 나타났군요"

 

몇 십 년간이나 봉인된 그곳의 열쇠를 관리했다던 그분은 (경리 누님) 나에게 파란색 광채가 빛이 나는 보석으로 장식된 '로드'를 주었다. 아.. 정신을 차려 보니 파란색 카드키였다.. 


"이 것은..?"


"이것은 특별한 자만이 출입할 수 있는 단 한 사람만의 선택된 사람 당신 만이 열 수 있는 '남자화장실'키입니다."


"오오.. 신성한 더러운 그곳"

그렇게 나의 5개 팀 56명의 여성이 있는 층에서 혼자 남자인 회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 후로 나만이 쓰는 이 신성하고 더러운 공간을 때로는 피난처로 때로는 휴식처로 쓰면서 험난하지만 재미있었던 여초 회사 생활을 했다. 


- 향기들이 전쟁을 하는 그곳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 복도 쪽 게이트를 열고 들어온 외부인들, 특히 남자들은 잠시 정신을 못 차린다. 회의를 하러 왔던 택배를 배달하러 왔던 층을 잘못 찾아왔던 게이트가 열리면 치열한 세계 전쟁의 소리 없는 전쟁에 정신을 잃게 된다. 바로 향수들의 전쟁이다. 이 향기를 맡게 되면 일단 다리에 힘이 풀리고 정상적인 사고가 어려워지며 이곳이 백화점 1층 매장인지 사무실인지 잘 분간이 안 가게 된다. 

하지만 업무를 하고 한 달 정도 지나자 이곳도 야근이 있는 날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생의 냄새가 나며 오후에는 떡볶이와 순대의 냄새가 진동하는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 여왕벌을 찾아라


내가 여초 부서에 발령이 난다고 하자 나름 이 회사에서 경력을 탄탄히 쌓은 분들이 조언을 해줬다. 어느 집단이든지 '여왕벌'이 존재하며 그리고 그녀를 따르는 '시녀벌'들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 여초 집단에서 내가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했다. (물론 팀마다 다양한 유형이 있으며 여왕벌이라는 존재가 없는 팀도 많다.)


여왕벌은 누구인가!

 20년 경력의 나이 많은 옆 팀장님 VS 나보다 어린 내 팀장님


우리 팀은 업무 특성상 옆팀과 거의 매일 소통을 하고 지냈다. 업무를 하다 보니 싸우기도 하고 업무 범위가 애매하기도 해서 니일 내일 경계가 모호하여 많이 싸우기도 했다. 


프로젝트 때부터 느꼈지만 서클렌즈를 낀(시대를 대충 유추할 수 있다.) 우리 팀장님은 나보다도 어리고 발랄한 여성이었다. 다른 회사를 다니다가 이직해 오신 지 이제 1년 정도 되었다고 했다. 상무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상무님은 우리 부서의 또 다른 남자였지만 임원실에 계셔서 같은 층에 근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팀장님은 나보다 어린 미혼이었다.(자 여기서부터 스토리 자동 상상 하는 N형 인간들 ㅋㅋㅋ)

 

"이동을 축하해요~ 남자 혼자라 힘든 점도 많겠지만! 저나 우리 팀원들이 다 도와줄 테니! 걱정 마요"


호탕하게 웃으며 서클렌즈를 반짝이며 악수를 청하는 팀장님과 악수를 나눴다.


'부... 부드럽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굴이 빨개졌다. 

특정상품 특정인과 관계 없는 이미지

"이야.. 김팀장 드디어 시집가겠다. 어? 아주 회사에서 맞선을 강제로 시키네"


옆 자리의 20년 경력의 깡마른 아주머니가 껴들었다. 


그 말이 무슨 기점이 되었는지 파티션 너머로 머리들이 하나둘 웃으며 떠오르며 나와 팀장님을 놀려댔다. 


'음.. 저분이 바로 여왕벌이군'


나는 바로 서클렌즈 팀장님과 선긋기에 들어갔다. 물론 공개적으로는 언제나 팀장님은 예쁘시다는 태도를 견지했지만 업무 외적으로는 최대한 거리를 두었다. 


이 점은 몇 십 년 동안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옆팀 팀장님에게 '경박하게 외모만 보고 헬렐레하는 요즘 것들과는 조금 다른 친구군'이라는 좋은 평가를 얻게 되었다. 사실 새 팀장님의 외모에 대한 평가는 발령 전부터 누누이 들었다. 입사 때무터 남직원들 사이에서 이슈가 되었고 그녀와 술자리를 만들기 위해 메신저가 터져나갈 정도로 반짝거리고 있는 것이 업무 지시를 받으러 가면 보였다. 


내 개인적인 처세술로 이런 분들과는 업무 외적으로는 최대한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자칫하다가는 구애를 하는 남자 직원들에게 찍혀서 공공의 적이 되고 그녀가 인기 많음을 질투하는 여자 동료들에게도 공적이 되어 영원히 매장된다. 내가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녀와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가 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남초 회사는 대부분 일 잘하고 상무님의 총애를 받는 실세남의 우산 아래 들어가 일을 배우는 것이 살아남는 처세 술이었다. (이 글이 또 반응이 좋으면 남초회사에서 살아남기도 올려보겠다.) 하지만 이곳은 축이 두 개였다. 회사 인간관계와 업무라는 두 개의 축이 있었다. 


- 병정벌의 공격


각 조직마다 특성이 다르겠지만 내가 겪은 여왕벌들은 대체로 공격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베일에 가려있었다. 대부분 여왕벌로 착각받는 것은 병정벌이였다. 그녀들은 보통 팀 내에서 목소리 큰 업무경력이 어느 정도 쌓인 사람이 담당했다. 보통은 이미 자녀도 초등학생이상이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노하우가 쌓일 대로 쌓인 분이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팀 내 군기 단속을 하고 외부 팀과 싸움이 일어나면 출동하여 사정없이 박살 내는 역할을 맡고 있다. 같은 편이라면 한없이 의지가 되지만 적으로는 절대 둬서는 안 되는 유형이다. 보통 여왕벌들은 이런 병정벌의 뒤에서 인자하고 자애로우며 드러나지 않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나 역시 이런 병절벌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 개인사로 문제없는 건 기본이지 그런데 업무 능력은? 


일단 나는 여왕벌의 존재를 파악하고 팀장과 거리를 두면서 여왕벌의 '노여움'을 사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다음 '내가 조직의 일원으로 충분히 역할을 하는가?'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 결재, 일단 회수하고 OO님과 합의부터 하세요."


서클렌즈 팀장님이 나에게 요청을 했다. 


옆 차장님이 합의자였다. 


"차장님, OO 건으로 결재를 올리려 하는데 합의 부탁드립니다."


"이리 와보세요. 일단 이 기안 양식부터 좀 봐주시고요. 공통 양식 아직 안 받았어요?"


차장님은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인수인계받은 대로 적어간 자료에 대해 물어봤고 나는 답변을 못했거나 그냥 하던 대로 했다고 답했다. 엄청난 불호령이 떨어졌고 우리 팀장님까지 소환되어 나를 사이에 두고 옆팀 차장님과 고성이 오고 갔다. 결국 나의 결재 문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우리 팀원들에 자료부터 다시 협조와 조사를 요청해야 했다. 


다들 남자 직원은 나 하나라고 웃으면서 도와주었지만 업무에서는 냉정했다. 결국 나는 밑바닥부터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가며 자료를 요청하고 선례를 확인하였다. 그전까지 일한 남초에서는 팀장님이 한마디 하면 팀장님이 시켰다고 핑계를 대면 일처리는 일사천리였다. 하지만 사수는 상무님이 시킨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시킨 일의 위계질서로 우선순위가 결정되었다. 


나는 이 시련을 잘 참아내었고 때로는 의도적인 업무 비협조를 이겨내고 모든 프로세스를 완성하고 다시 차장님에게 보고서 초안을 보여드렸다. 


"음... 음... 음.. 잘 조사했네요~ 다음부터는 이렇게 보내주고요 이렇게 자리로 오지 말고 그냥 합의 요청 하세요."


"넵 감사합니다."


그 뒤로도 몇 번 이런 업무 상 확인 절차와 시련이 있었다. 그녀는 때로는 옆팀 옆 측 상무님 한테도 따지러 갔다. 그녀의 자리에 나처럼 보고하러 갔다가 엄청난 공격을 받고 물러나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 전문분야는 나도 고성을 내었고 따지고 양보하지 않았지만 모르는 분야는 협조하고 양보했다. (가끔은 나의 신성한 생츄어리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 혼자서 난리 부르스 발광을 하고 주먹질 손가락 욕을 하고 왔다.)


간단하게 썼지만 이 시련은 매우 길고도 험했다. 회사일이 언제나 간단하게 딱딱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내가 일을 잘 처리해서 차장님의 맘에 들었다고만 기억하고 싶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어느 시점부터 내가 일을 열심히 하려 한다는 것을 느낀 차장님이 알게 모르게 나를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이제야 생각된다. 



- 신성한 통과 의례 : 오후 4시 반 떡볶이 타임


내가 오고 나서 한동안 안 하고 있었던 의식이 있었다. 어쩌면 내가 와서 어디선가 숨어서 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팀장님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는 '어린이날'이 되면 떡볶이를 시켜 먹는 것이다. 가끔은 팀장님이 있어도 프로젝트가 끝났거나 마감이 끝나면 하기도 했다. 


팀원들이 더 이상 나를 남자라고 생각 안해게된 어느 날부터인가


"매운 거 당기지 않아?"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 막내일 때도 있고 어느 정도 직급이 있는 사람일 때도 있었다. 마치 오늘 소주 한잔? 했던 남초의 대화처럼 거절할 수 없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그러면 팀 내에서 가장 분식집 메뉴에 정통하며 팀원들의 입맛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으며 온갖 쿠폰을 관리하고 있는 '언니'가 활약을 한다. 모든 사람의 배고픔 정도를 파악하고 다이어트 정도를 파악한다. 대부분 다이어트 중이었다... 왜 파악하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이다. 내가 진짜 다이어트 중일 때도 있었는데 다이어트라고 밝혔다가 호되게 공격당하고 그냥 내 몫을 시켜야 했다. 

이때 나의 역할은 '남자가 있으니까 많이 시키자'였다. 내가 아무리 배가 불러도 내 역할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배달이 오면 나는 가지러 가는 고정 멤버였다. 직급도 낮은 편이었고 그냥 편하게 내가 자처했다. 그러면 아무리 조금 시켰어도 한 명이 같이 와줬다. 이건 불문율인 듯했다. 


그리고 나면 행복한 수다와 함께 떡볶이 순대 튀김 김밥을 먹는 시간을 가졌다. 어린이날의 행복함이었다. 나도 여기서 여성들의 대화법을 많이 배웠다. 다만 내 역할이 하나 더 있었는데 모든 접시에서는 떡볶이 한 개 순대 한 개, 튀김 한 개가 남았다. 그것은 법칙이었다. 왜 꼭 한 개를 남겨두는지 모르겠지만 모두 다 마지막 하나를 먹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그것은 '남자'인 내가 먹어야 했다. 내가 아무리 다이어트 중이거나 얘기에 안 끼고 허겁지겁 주어먹어서 배가 터질 것 같아도 변함이 없었다. 


나는 그것들을 사양하다고 꿀떡꿀떡 주워 먹었고 그녀들에게 '그래 저건 안 먹었으니 많이 먹은 건 아냐'라는 안심을 주었고 챙김 받는 하나뿐인 남직원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물론... 살은... 그냥 포기하자


- 외모를 치장하기보다는 깨끗하게 하고 다녀야 한다. 


  여초 팀에 간다고 하자 친구들은 매우 부러워했다. 회사사람들은 이미 그 사회를 잘 알기 때문에 나를 위로했다. 소위 인기 많은 친구들은 나에게 패션에 대해 전수해줬다. 가서 잘 입고 다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초팀에 가서 내가 느낀 것은 잘 차려입고 다니기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사람들이 가능한 것이고 나는 차려입고 하루 이틀 주목받기보다는 깨끗하게 하고 다니길 원했다. '씻기 상태', '털', '옷 세탁', '냄새', '각종 소리'에 대해서 많은 조언(조언을 넘어 나의 요새 남자 화장실 가서 번뇌했던 충격적인 날들도 있었지...)을 받았다. 

결국 아침에 서로를 보면서 외모 칭찬을 하고 내 옷차림에도 얘기들을 많이 했지만 어느 정도 지나자 그냥 나한테 관심 있다는 표현을 하고 싶을 뿐 깨끗하게만 입고 오면 뭘 입고 오는 지도 별 관심이 없었다. 초반에는 매일 매일 내가 뭘 입고 가는지 머리가 어떤지 코멘트 때문에 신경이 엄청나게 쓰였다. 조금 지나자 그냥 잘 씻고 옷 잘 갈아입고 다니면 되는구나를 느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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