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까미노데산티아고에 발을 딛다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라는 도시를 향해 걷는다는 순례자의 길이 스페인에 있다고 했다. 여행 정보를 뒤적이며 일상을 위로하던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특별한 여정이 바로 그 까미노데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였다. 걷는 것을 좋아하거나, 종교적인 관심에서 시작하는 별종들의 고행길이겠거니 생각이 되었다.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뭣 하러 스페인까지 가서 시골길을 걷겠나 싶었다. 세상에 여행할 곳이 얼마나 많은데 소중한 시간을 따분하게 걷기만 하다 오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걷는다", "한 달 이상", "800킬로미터"라는 단어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게 산티아고를 기웃거리던 사이, 이 길을 걸어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기도 하고 인터넷이나 각종 매체로부터 정보를 접하면서 마음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일생의 한 번쯤"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일생의 한 번쯤은 내 몸만을 움직여 이동하는 순례자의 고행에 나를 맡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 달을 걷는 것은 어떤 것일까? 부랴부랴 인터넷 카페에 가입하고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게 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고 싶은 건 명확해졌다. 온전히 내 동력만으로 나아간다는 것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걷고 싶어 졌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산티아고(Santiago)는 성야고보(Saint diego)의 합성어라고 한다. 까미노데산티아고는 “성야고보의 길”인 것이다. 예수 사후에 스페인의 갈리시아에 복음을 전파했던 성야고보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순교를 하게 된다. 자신의 설교지에 묻어달라는 야고보의 유언을 받들어 제자들은 유해를 탈취해 바다로 띄웠다. 배는 기적처럼 그가 처음 설교한 곳에 도착했고 그를 알아본 원주민들이 유해를 안치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9세기 초, 목동이 별빛을 따라 가다가 그 무덤을 발견한다. 교황청은 이를 야고보의 무덤이라 공식 승인하기에 이르고 급기야 그를 기리기 위해 성당을 건축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라는 도시가 형성되었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는 10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는 감히 전설이다. 그리고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을 일컬어 페레그리노(Peregrino : 순례자)라고 일컫게 된다.
산티아고 길은 한 가지가 아니다. 자신의 집에서 출발해서 산티아고를 향해 걷는 그 길이 바로 "까미노데산티아고"가 된다. 물론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최적의 위치일테지만 유럽인들 중에는 진짜 자신의 집에서부터 걷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 여러 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길은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되는 프랑스 길이고 그밖에도 마드리드 길, 은의 길, 북쪽 길 등 많은 길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처음 내 눈에 들어온 길은 가장 보편적인 길, 프랑스 길이었다.
프랑스길(Camino Frances)은 프랑스의 생장에서 출발해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라는 스페인 북동쪽 마을을 거쳐 서쪽의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가는 대장정의 길이다. 여기가 마드리드니까 프랑스 생장(St.jean pied de port)까지 갔다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론세스바예스로 가고 싶지만, 오늘은 복병이 있다. 요즘 피레네 산맥에 눈이 너무 많이 내리는 것이다. 산을 넘는 것은 쌓인 눈 때문에 무리라는 결론을 내린다. 생장으로 가지 않고 다음 마을인 론세스바예스에서 첫걸음을 시작할 것이다.
마드리드의 알베르게에 함께 묵은 케이도 나처럼 3월 1일에 출발하려는 계획이라고 한다. 당연히 혼자 가게 될 줄 알았는데 자연스럽게 둘이 떠나게 된다. 이미 인도와 남미를 여행하고 산티아고 길에 들어선 터라, 짊어지고 다니던 큰 배낭의 짐을 덜어 작은 배낭에 넣어 마드리드 알베르게에 맡기고 간다. 일단 팜플로나(Pamplona)라는 도시로 출발해서거기서 론세스바예스로 향하는 버스로 갈아탈 예정이다.
스페인 버스는 신기한 게, 장거리 이동도 좌석번호가 없다. 좌석번호가 있어도 다들 무시하고 앉는 분위기다. 수하물을 실을 때도, 따로 수하물표를 주던 남미와는 달리 우리나라처럼 그냥 짐칸에 넣는다.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다른 터미널에 정차해서 사람과 짐을 태우고 내리는 이 버스에서 혹시 짐이 분실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하지만 장거리 이동이 아님에도 화장실까지 갖추어진 버스가 편리하기는 하다. 그동안의 여행지와 달라진 시스템을 비교하는 와중에, 벌써 팜플로나에 도착한다. 출발할 때부터 잔뜩 흐리던 하늘에서 비가 뿌리고 있다. 팜플로나 버스 터미널에 하차해서 점심을 먹는다. 메뉴를 잘 모르니 점심은 "메뉴델디아(Menu del Dia : 오늘의 메뉴)"를 고른다. 어제 톨레도와는 다르게 와인과 고기가 나온다.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
팜플로나는 어차피 까미노에서 거쳐야 할 도시다. 며칠 후엔 이곳을 걸어서 지나가게 될 것이다. 론세스바예스행 버스를 타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는다. 시티맵을 구해서 근처에 있다는 데카트론 매장에 등산용품을 보러 가기로 한다. 케이는 한국에서 모든 걸 준비해왔지만, 여행 중에 까미노에 들어선 나는 준비한 게 없어서 등산화라도 사야 하나 싶다. 비 오는 길을 걷는 것 또한 까미노에서 거쳐야 할 과정이기도 하니, 배낭을 메고 그 위에 우비를 꺼내 쓰고 연습 삼아 걸어본다.
하지만 팜플로나는 생각보다 큰 도시인 데다가 데카트론 매장은 너무 멀다. 걸어서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이미 두어 시간이나 거리를 헤매고 난 다음이다. 배낭에 우비를 입고 걷는 모습이 순례자로 보이니까 이곳 사람들이 대중교통 이용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고 방향만 계속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순례자들은 일부러 걷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빗속에서 걷기 연습만 충분히 하고 등산용품 매장은 구경도 못한 채 부랴부랴 터미널로 돌아온다. 버스 탈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두 시간쯤 걸어봤는데 괜찮은 것 같다. 이런 식으로 걸으면 될 것 같다는 느낌만 충만한 채로 버스를 기다린다.
드디어 론세스바예스로 가는 버스가 온다. 론세스바예스에서 까미노 출발하는 사람도 많아서인지 이 버스엔 등산복을 입고 배낭에 스틱을 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올라탄다. 버스는 스페인의 북동쪽 끝을 향해 달린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창밖의 비가 진눈깨비로 변하는가 싶더니 급기야 눈보라가 되어 펑펑 쏟아진다. 눈이 쌓인 시골 도로 위를 버스가 조심조심 움직인다. 눈 때문에 예정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론세스바예스는 아예 하얀 눈의 나라다. 초행길인 데다가 눈이 쌓여 있고 어둡기까지 하니 어디가 알베르게인지 감도 오지 않는다. 그저 함께 내린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줄줄이 따라갈 수밖에 없다.
행렬을 따라 간 그곳이 알베르게가 맞다. 우선 2유로를 내고 크레덴시알(Credencial)이라는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는다. 순례자 여권을 가지고 있어야 알베르게에서 묵을 수 있다. 크레덴시알에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의 도장을 받고 숙박비를 낸다. 오늘 숙박비는 6유로다. 오늘이 2월 28일, 비수기여서 그런지 알베르게의 도미토리룸 중에서 방 두 개만 문을 열어준다. 하나는 프랑스의 생장에서 눈길을 헤치고 넘어온 여행자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고 나머지 방이 오늘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한 사람들 차지다. 6유로짜리 숙소가 뭐 그리 좋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 삐걱대는 침대나 수근 대는 많은 인원에도 그런가 보다 하고 있는데, 한국을 떠난 지 사흘밖에 되지 않는다는 케이는 이런데서 어떻게 자냐고 영 못마땅한 얼굴로 투덜거린다.
저녁은 먹어야 하겠기에 쏟아지는 눈을 맞고 쌓인 눈은 밟으면서 언덕 위 불빛이 보이는 식당으로 간다. 따뜻한 식당 안은 이미 순례자들로 바글거린다. 메뉴델디아(Menu del Dia : 오늘의 메뉴)가 아니라 메뉴델페레그리노(menu del Peregrino : 순례자의 메뉴)로 바뀌어 있는 메뉴판이 까미노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어둠 속의 작은 마을에 크리스마스의 축복처럼 눈이 내린다. 걸음이 시작될 내일도 눈이 내릴까 걱정은 되지만 인도와 남미에서 겨울을 보낸 터라 내리는 눈이 반갑기도 하다. 결국은 사지 못한 등산화 때문에 얇은 트레킹화를 신고 걸어야 한다. 당장 내일 발이 젖을지는 몰라도, 좁은 알베르게의 사람 북적이는 샤워실이 불편하고 내일 수건도 마르지 않을 것 같아 오늘 밤 씻지 못해 찝찝해도, 저 소박한 눈, 느닷없이 펑펑 쏟아지는 눈이 마음을 정화해 준다.
인도를 지나 남미에 다녀온 발걸음이 향하는 여정은 이제까지의 여행과는 확연히 다르다. 과연 "하루하루 걸어서 800km 이상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 여행자가 아니라 "순례자"가 되어 걸어갈 이 길은 "길은 걷는 자의 것"이라는 말처럼 나의 길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