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에 첫걸음을 내딛다

까미노데산티아고+1

by Girliver

3월 1일의 발걸음 : 론세스바예스(Loncesballes)에서 수비리(Zubiri)까지 21.8Km



첫걸음의 설렘으로 일어나 얼른 문밖으로 나가 본다. 다행히 눈이 그치긴 했지만 밤새 내린 눈이 온 마을에 소복이 쌓여있다. 3월의 스페인 북부지방은 비가 많고 쌀쌀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눈이 내릴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밤에 기온이 많이 내려갔는지 눈이 녹지 않고 생각보다 많이 쌓여 있어 곤혹스럽다. 날씨가 추워서 청바지를 입고 가려고 했는데 눈에 젖을 게 뻔해서 얼른 파타고니아에서 사 온 등산용 바지로 갈아입는다.


오늘이 까미노 첫날인데 눈 속을 걸어야 하다니 난감하다. 옷을 차려입고 신발 끈을 조이고 알베르게 문 앞에 서지만 선뜻 발걸음을 내닫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이 눈 속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은 나 하나가 아니다. 어제 함께 잤던 사람들이 하나 둘 깨어 움직이고 있다. 눈길은 먼저 출발한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어지럽고, 지금 막 내 옆에서 등산화 끈을 조이고 있는 순례자도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어제 생장에서 출발해서 이곳으로 걸어와 오늘이 두 번째 날이거나 우리처럼 이곳에서 처음 출발하는 사람들 모두 이런 상황이 달갑지 않은 것이다.


걷기 첫 날 아침에 론세스바예스에 쌓인 눈. 예상 못한 봄눈에 기가 죽었다.

용기를 내어 눈 속을 걸어서 출발한다. 추울까 봐 패딩을 입고 그 위에 바람막이까지 덧입고 배낭을 메고 나니 몸이 둔할 지경이다. 다 내리지 못한 눈발이 다시 흩날린다. 길은 때 아닌 설경으로 아름답기는 한데 걷기가 힘들다. 기온이 영하는 아니라서 이미 내린 눈은 사람들의 발걸음에 녹아 진흙범벅이 된다. 앞뒤로 걷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걷다가 까미노에서 처음 말문을 트게 된 사람들은 콜롬비아에서 왔다는 중년의 부부다. 이럴 때는 샛길로 가지 않는 게 현명하다며 차가 다니는 대로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저씨를 쫒아 걷는다. 한참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도 샛길을 피해 큰길로 눈을 맞으며 걸어온다.


하지만 까미노가 안내하는 화살표를 따라가야 하니까 계속 대로로 갈 수가 없다. 결국은 샛길로 들어서야만 한다. 좋은 계절이었으면 걷기 좋고 볼 것도 많은 풍경이었을 길이지만 많은 양의 눈이 녹아서 시냇물이 흐르는 듯 물길이 되어 있다. 발이 젖는 게 신경 쓰여서 자갈이나 큰 돌을 딛고 가보려 하지만 걷다 보면 어느새 발은 눈 녹은 물에 빠지곤 한다. 신발이 젖기 시작할 때는 더 많이 젖는 것을 막아보고자 요리조리 피해 걸어보지만 등산화도 아닌 가벼운 트레킹화인 내 신발은 다 젖어버린다.


또 하나의 낭패는 옷이다. 추울까 봐 챙겨 입은 패딩에, 바람막이에, 눈이 내린다고 우비까지 쓰고 걸었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서 열불이 난다. 걷는 걸음이 몸에 온기를 지펴주고 한 낮으로 가면서 기온자체도 오르는 중이라 그런 것이다. 많이 걸어본 경험이 없는데다 다른 여행 준비하느라 사전 지식도 없이 와서 이런 사태가 발생한다. 일상에서 나의 두 다리는 걷는 것보다 식물처럼 몸을 지지하는 역할로 많이 사용하긴 했다. 인류의 위대한 역사가 직립보행에서 비롯되었다는데 "직립"만하고 "보행"은 소홀히 하며 살았으니 걷는데 필요한 상식이 있을 리 만무하다. 언제나 "직립"하다가 자동차가, 에스컬레이터가 데려다 주던 세상에서 전문적인 "보행"의 세상으로 들어오니 고생이 이만저만 이 아니다.

꽃이 피고 고양이들이 졸고 있는 봄날, 눈밭을 걷는 것은 당혹스럽다

걷다가 만난 작은 마을에 바(Bar)가 있어 얼른 들어간다. 아침에 만난 콜롬비아 부부도 여기에 들어와 있다. 까미노에선 이런 식으로 만나는 게 비일비재 한 듯하다. 아침도 챙겨먹지 않고 걸어서 배도 고프다. 패딩을 벗어 배낭 속에 넣고 젖어버린 운동화 속 양말도 벗어 놓고 요기를 한다. 레스토랑이 아니라서 음식이라곤 바게트 빵 사이에 음식을 채워 먹는 보까디요(Bocadillo)와 커피가 전부다. 참치 보까디요와 까페콘레체(Cafe con Leche : 밀크커피)한 잔을 주문한다.


먼저 음식을 드시던 콜롬비아 아줌마는 다 젖어버린 내 신발을 가리키면서 어떡하느냐고 걱정을 해주신다. 아줌마의 따뜻한 한마디가 용기를 주지만 방법은 없다. 젖은 몸에서도 까페콘레체에서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커피를 쥐고 따뜻하게 손을 녹인다. 보다 못한 케이가 여분으로 준비해온 장갑을 빌려준다. 그러고 보면 난 참 대책 없이 까미노에 뛰어들었다. 사람들이 딛고 다니는 스틱도, 장갑도, 방수가 되는 제대로 된 등산화도 없이 배낭 여행하던 짐을 그대로 지고 걷겠다고 왔으니 말이다. 갈아 신어봤자 젖을 게 뻔해서 젖은 양말을 다시 신고 배낭을 멘다. 언제까지 쉬고 있을 수는 없으니 다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수비리(Zubiri)라는 마을이다. 까미노를 걷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방향을 알려주는 표시가 있다. 때로는 작은 비석에 조개 모양이기도 하고 건물에 표식이 붙어 있기도 하다. 노란 화살표를 그냥 그려놓은 곳도 있다. 어쨌든 노란 화살을 따라가면 되니 길을 잃을 염려는 별로 없다. 하지만 오늘 까미노가 처음인 순례자들은 그 표시도 잘 찾지 못한다. 작은 마을의 바(Bar)에서 나오자마자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는다. 눈은 내리고 사람도 별로 보이지 않는 마을을 헤매고 있자니, 어느 집 이 층에서 고개 내밀고 쳐다보던 할머니가 웃으면서 마을을 나가는 방향을 알려주신다. 우리를 한참 동안 지켜보신 것 같다. 스페인 북부의 작은 마을에 까미노가 아니라면 올 사람도 없을 것이고 농번기도 아니니 이방인이 헤매는 모습이 눈에 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길을 제대로 찾아 열심히 걷는다. 오후가 되면서 눈은 비로 변하고 아예 물이 졸졸 흐르게 된 오솔길에서 신발은 다시 젖는다. 길이 미끄러워서 이젠 젖는 게 문제가 아니라 넘어지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 판초우의를 둘러 쓴 덩치 좋은 순례자가 미끄러져 쿵하고 넘어지는 모습을 보자니 웃기면서도 서글프다.


이 길을 걷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힘이 들다는 생각을 하면 저 앞에서 걷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내 모습이겠구나 싶다. 그렇게 정신없이 걷다가도 가끔 마주치는 다른 순례자들과는 인사를 나눈다. 캐나다에서 왔다는 예쁜 할머니는 힘들게 걸으면서도 자기는 한국어 하나도 못하는데 너희는 영어도 잘한다며 웃어주신다. 그 센스 넘치는 한마디가 이 와중에 고마워서 함께 웃게 된다. 할머니도 걸으시는데 나도 열심히 걸어야지 용기도 생긴다.


그 와중에도 지나가던 모두를 웃게 한 것은 어떤 표지판이다. 오솔길에서 나와 도로로 연결되는 곳이라 차들에게 우선 멈추라고 경고하는 "STOP"표지판에 순례자의 낙서가 위아래로 덧씌워져 있다. "Don't stop walking!" 한 사람이 그걸 가리키며 읽으니 나머지 순례자들의 웃음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 오전 내내 눈밭을 헤치며 걷다 보니 어디라도 멈추어 쉬고 싶지만 목적지까지 걸어야만 하는 운명을 지닌 순례자들에게 그 말은 맞는 말이면서도 왠지 서글픈 말이다.


신발이 완전히 한번 푹 젖고 나서는 운동화 안으로 물이 들어오든 말든 아예 신경을 쓰지 않고 걷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그것이 오히려 편한 방법이었음을 깨닫는다. 진작 포기했다면 걷는 게 조금은 수월했을 텐데... 결국엔 젖을 걸 알면서도 조금이라고 덜 젖게 하겠다고 조심해봐야 걷기만 더 힘든 노릇이었다. 포기하니 오히려 쉬워진다. 눈이 많이 내리기는 했지만 눈 녹은 물은 동상이 걸리도록 차갑지도 않은데 그럴 거라고 예상만 하고 지레 겁만 낸 것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사색에 빠져 한 걸음씩 나아가는 그림 같은 풍경을 상상해 왔는데, 오늘 제일 많이 한 생각은 신발 걱정이다. 걷는 것이 핵심이라면 신발이 젖는 것쯤은 사소한 문제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손에 쥐려고만 했던, 별 것도 아닌 아집을 놓아버릴 수 있었다면 그다음부터는 쉬워졌을 일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을까? 버리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능력이다.


평소에 걷는 것과는 담쌓고 지내는 나는 7.5km 남았다는 표시를 봐도,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앞으로 몇 시간을 더 걸어야 하는 건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계속 까미노를 걷다 보면 거리감도 생기겠지만 오늘은 예상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이미 병역의 의무를 마친 케이는 행군을 해봐서 그런지 거리를 예측하는 것도 잘한다. 케이 말대로 그 표시를 보고도 두 시간이 훨씬 넘게 걸어서 수비리에 들어온다.



마을에 들어와 다리를 건너자마자 바로 보이는 알베르게에 들어간다. 이곳에 알베르게가 세 개나 있다는데 힘들어서 둘러볼 기운도 없다. 알베르게는 공립알베르게와 사립알베르게가 있는데 사립알베르게인 이곳은 시설이 쾌적하고 라디에이터도 있어 좁긴 하지만 따뜻하다. 숙박하는데 10유로이니 비용은 조금 더 들지만 어제의 6유로짜리 공립알베르게보다 훨씬 깨끗하고 편하다. 6유로나 10유로나 순례자 길의 비용이라 싸긴 마찬가지다. 크레덴시알을 펼쳐 알베르게 도장을 받고 돈을 지불한 다음 도미토리로 들어간다.


방에는 이미 도착해서 보송보송한 침대에 누워서 쉬고 있는 사람도 있다. 미국,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한국 사람까지 국적도 다양하고, 이십 대부터 육십 대까지 연령도 다채로운 사람들이 한 방에서 머물게 되었다.

2시가 넘어 도착해서 짐을 풀고 있는데 먼저 와 있던 영국 여자가 하는 말이 가게에 갈 거면 지금 빨리 가라고 한다. 시에스타(Siesta)가 2시 30분부터라서 이제 가게가 막 문 닫으려 한다고 말이다. “앗, 진짜 여기가 스페인이구나.” 하고 무릎을 친다. 톨레도는 유명한 관광지라 몰랐지만 여기 스페인에서는 시에스타를 꼭 지키는 것이다. 빗방울 떨어지는 길을 뛰어가 문 닫기 직전인 메르까도에서 바나나와 계란 몇 알, 간식거리를 사가지고 온다. 낮에 문을 닫으면 저녁 6시는 되어야 여는 여유로운 가게는 한겨울에도 시에스타 시간을 지키는 스페인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샤워하고 우비를 말리고 빨래해서 요령껏 널어놓고 젖은 신발도 빨아서 라디에이터 위에 엎어놓는 일로 오후가 간다. 먼저 도착해서 쉬고 있던 순례자 중에 미국에 사는 한국교포 부부가 있다.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된 교포들이지만 한국인으로서의 동질감은 당연히 생긴다. 게다가 서로 까미노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이니 더욱 그렇다. 순례자의 길에서 처음 먹는 저녁식사는 누구에게나 호인일 것 같은 미국 교포 리처드가 사준 "메뉴델페레그리노(Menu del Pergrino : 순례자의 메뉴)"다. 누구나 소박해지는 순례길 첫날, 누군가 나에게 저녁을 사 줄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해서 더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저녁을 먹으며 부부의 이야기를 듣는다. 한 달간의 휴가 동안에 남편은 자동차나 렌트해서 편하게 스페인과 포르투갈로의 여행을 꿈꿨고 부인은 산티아고 순례를 원했다고 한다. 천방지축 캐릭터의 남편을 굳이 까미노에 데리고 와서 티격태격하면서 걷고 있는 부인이 힘들어 보인다. 지금이라도 순례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자는 남편과 계속 이 길을 걷자는 아내는 내내 토닥거린다. 잠깐 보기만 해도 극단의 스타일인 부부가 일상에서는 어떻게 맞춰 살까 걱정이 될 정도다. 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의 리처드도 천상 현모양처일 듯한 케이트도 지금은 순례자로 까미노를 걷는 중이다. 저렇게 아옹다옹하면서도 결국은 까미노 위에 선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렇게 걷다 보면 결론도 생길 것이다. 그렇게들 각자의 짐만큼을 짊어지고 함께 또는 혼자 걸어가는 것이 "까미노"이기도 하고 "인생"이기도 하다.


"걷기 시작한다. 계속 걷는다. 그리고 멈춘다."라고만 쓰게 될 것 같았던 까미노의 첫날은 이렇게 지나간다. 라디에이터 위에 엎어놓은 얇은 내 신발은 불행 중 다행으로 물에 잘 젖는 만큼 잘 마르기도 한다. 제발 내일 아침 신발이 다 말라있기를 기대하며 자리에 눕는다. 쌓인 눈에, 종일 내리던 빗방울에, 젖은 신발에 쉴 새 없이 떠밀려 걸은 듯한 까미노의 첫날이 끝난다. 누군가 도마토리의 전등을 끄자마자 곯아떨어지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린다. 모두들 눈밭을 헤치며 걷느라 힘든 하루였을 것이다.


걷기 첫 날, 알베르게 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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