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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날의 사소한 풍경들

[마드리드] 몇 번을 둘러보는 광장들과 터미널에서 만난 로스 할머니

by Girliver

배낭을 꾸려 맡겨놓고 숙소 테이블에 앉아 언제 다시 먹을지 모르는 신라면을 먹으며 남은 여행 일정을 정리한다. 곰곰 생각해보니 비상금으로 가지고 있던 300달러가 온 데 간데없다. 막연히 복대 안에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까미노 중에는 한 번도 챙기지 않다가 오늘 다시 생각하니 없다. 까미노를 걸을 때 땀이 많이 나고 불편해서 중간에 아예 복대를 가방에 넣어두고 다녔었다. 누가 손을 댄 것은 아닌 것 같고 가끔 신분증을 보여줘야 하는 알베르게에서 여권을 꺼내다가 분실한 것 같다. 여행 중에 300달러는 작은 돈이 아니지만,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을 아쉬워한다고 돌아올 것도 아닌 걸 알기에 포기하기로 한다. 아쉽지만 까미노의 누군가는 내 덕분에 횡재했을 것이다.


울음이 끝나도 흐느낌이 쉽게 멈추지 않는 아이처럼 산티아고로의 걸음을 마쳤어도 나에겐 까미노의 여운이 길게 남아있다. 그 여운으로 포르투에서의 4일도 보내고 여기 마드리드의 알베르게에서 순례를 마치거나 시작하는 사람들과 마주치면서 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대장정이 마무리됨을 실감한다.

밤 11시에 출발하는 버스라 시간이 온종일 남는다. 배낭을 맡겨두고 오후 세 시쯤 되어 솔 광장으로 나가본다. 날마다 나와서 익숙해진 솔 광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후는 아침이나 밤 풍경과는 또 다르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햇살 아래 어디선가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려들고 커다란 버스가 쏟아놓은 패키지 관광객들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구경을 하고 있다.

마요르 광장으로 다시 가본다. 어제는 보지 못한 벽화가 그려진 건물도 눈에 띈다. 날씨가 좋아져 사람들의 옷차림도 각양각색이다. 잠깐 들러서 뭘 보고 사라져 버리는 여행자에겐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게 여행 맞다. 그러나 머문다고 해서 코끼리의 모든 걸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사는 세상도 다 이해할 수 없는데...

장화 신은 고양이는 아이에게 결투(?)를 청하고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고양이를 바라보던 아이도 장난감 칼을 든다. 아이는 얼마나 재미있을까? 지켜보기만 해도 즐거워 보이는 장면이다. 떠나는 사람에겐 모든 장면이 다 예쁘고 아스라한 추억으로 남겨진다.

마요르 광장에 나있는 아홉 개의 문을 통해 나가면 작은 골목들이 이어진다. 골목에는 아기자기한 장난감과 인형만을 파는 상점이 눈길을 끈다. 여성을 주제로 한 책이나 초상화를 파는 리브레리아 무헤레스(Libreria Mujeres)라는 가게도 들락거린다. 여성 작가, 여류 화가와 관계된 소품들을 전시하고 파는 곳이다. 같은 스페인어 문화권이어서인지 프리다 칼로의 기념품도 팔고 있다.

떠나는 상념으로 골목을 쏘다니다가 다시 솔 광장으로 온다. 해가 넘어가면서 긴 그림자를 드리우지만 공중부양 퍼포먼스는 여전히 계속 중이다. 저렇게 하루 종일 있으면 어쨌든 힘이 들 것인데, 얼마나 호기심을 자극했느냐에 따라 노동의 대가가 결정될 것이다. 어제 처음 봤을 땐 신기하기만 했는데, 오늘 다시 보니까 막상 가면 속 그들이 궁금해진다.

기마상 아래에선 아예 악단(?)이 버스킹(busking) 중이다. 여러 사람이 연주하는 아름다운 선율이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끈다. 광장의 메트로 입구에선 달변의 아저씨가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얼마나 이야기를 감칠맛 나게 하는지는 겹겹이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가 조용히 빠져나온다. 거기 서서 참여하고 싶지만 스페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내겐 소음일 뿐이다. 그래도 관광객뿐 아니라 현지인들이 즐기는 이 광장의 흥청거림이 보기 좋다.

은행 앞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몰려 시위를 하고 있다. 나는 여행자로 마드리드를 지나치고 기억하겠지만 마드리드 사람들에겐 삶의 터전이다. 여행자는 아름다운 풍경, 유서 깊은 장소, 특이한 소품들에 한 눈이 팔리지만 이곳에도 반복되는 일상이 있고, 열렬히 외쳐야 하는 처연한 삶도 있다.

인파로 붐비는 솔 광장을 뒤로 하고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메트로에 오른다. 밤 11시 출발하는 버스라 슬슬 들어가서 짐을 챙겨야 한다. 숙소에 들어오니 오늘 아침 도착한 한국인 부부가 배추 된장국을 만들고 계신다. 내일부터 자전거로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면서도 나의 여행길을 더 걱정해 주신다. 배추를 넣은 된장국이란 걸 거의 4개월간 못 먹은 데다가 앞으로는 한식 먹을 기회는 별로 없어서 염치 불구하고 꾸역꾸역 먹게 된다.


남부 버스터미널 역으로 가기 위해 배낭을 멘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한 식탁에서 밥을 먹고 그들의 걱정과 인사를 뒤로 하고 터미널로 간다.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의 설렘 속에 나는 또다시 외로워지는 순간, 리스본으로 데려다 줄 버스가 도착한다. 운전사 뒤쪽 둘째 줄 창가에 자리를 잡는다. 오늘 밤은 목소리 낼 일이 없겠다고 생각하며 출발을 기다린다. 밤차로 국경을 넘는 승객들이 하나 둘 버스에 오르고 자리를 잡는다.


그때, 인도인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앞자리에서 두리번거린다. 아마 좌석 때문인 것 같다. 나도 처음 스페인 버스를 타고서 이상했으니까. 스페인 버스는 원래 정해진 자리가 없다고 이야기를 해드리고 같이 앉아도 되겠냐고 묻는다. 할머니도 단박에 오케이 하신다. 여행 초창기에 인도를 여행하고 온 터라 마드리드에서 만나는 인도 사람이 반갑기도 하다.


함께 앉게 된 할머니는 인도인이 아니라, 여행지에선 좀체 만날 수 없는 태국인이다. 작은 체구에 까무잡잡한 피부, 작은 캐리어를 끌고 또 앙증맞은 배낭을 메고 다니는 이 태국인 할머니는 놀랍게도 자유여행을 하고 계신다고 한다. 익살스럽게 나이를 맞혀 보라고 하셔서 기분 좋으시라고 쉰일곱 같다고 하니 무척 좋아하신다. 로스 할머니는 자그마치 칠십 세다. 지금은 태국에 살지만 미국에서 살면서 계속 일했고, 두 딸은 샌프란시스코에 산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외로운 밤을 보낼 줄 알았던 심야버스 안에서 동행을 만나게 되었다. 졸릴 때까지 이야기도 하고 중간중간 내려주는 간이터미널의 짜증 나는 화장실 흉도 보면서 로스 할머니와 함께 리스본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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