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 삶이 녹아있는 열정적인 춤
그림자가 길어지기를 기다려 산타크루스 지구의 꼭대기로 올라간다. 오전에 예매해 둔 플라멩코 공연을 보기 위해서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예쁜 골목을 돌아다니며 가게들을 둘러보고 엽서를 부칠 우표도 사면서 시간을 때운다.
예매할 때 예매번호가 1번이어서 사람이 너무 적으면 어쩌나 했던 걱정은 기우였다. 로스 가요스(LosGallos)라는 이 공연장은 세비야에서 가장 오래된 타블라오(Tablao : '판자를 깔다'라는 뜻으로 플라멩코 무대를 뜻함)라고 하더니 역시 명불허전이다. 그리 크지 않은 객석은 금세 꽉 찬다. 샹그리아를 한 잔을 주문해서 앞자리에 앉는다. 작은 무대가 전부라서 과연 어떤 공연이 될지 궁금하다.
먼저 가수와 기타 연주자가 자리를 잡는다. 곧이어 기타가 연주되고 가수는 박수를 치며 노래를 시작한다. 성량이 풍부한 가수의 노래는 애절하다. 게다가 박자를 맞추는 그의 두 손은 또 하나의 악기가 되어 공연장에 울린다. 기타리스트 역시 멋진 선율을 선사한다.
그렇게 음악으로 분위기가 고조될 무렵, 몸집이 통통한 중년의 댄서가 화려한 플라멩코 의상과 구두를 신고 등장한다. 그녀는 발을 절도 있게 구르며 몸을 날렵하게 돌리면서 음악에 맞춰 격렬하게 춤을 춘다. 캐스터네츠를 울리고 손목을 돌리며 박자를 맞추고 가수와 기타 연주자와도 교감하며 발을 구른다. 나비처럼 여린 몸짓에 숨을 죽이는 관객들은 어느새 허리케인을 몰고 오는 그녀의 몸놀림에 환호한다. 댄서의 온몸과 온 마음이 춤에 스며든다.
이어서 남자 댄서의 격정적인 공연이 이어진다. 화려한 복장의 여자 댄서만을 상상하던 내 눈에는 남자 댄서의 힘 있는 춤사위가 너무도 멋지다. 가수와 기타 연주자들은 팀을 이루어서 무대를 바꾸며 연주한다. 춤과 노래를 함께 하는 댄서의 공연도 있다. 댄서의 이마를 적시는 땀방울에 관객들은 격한 박수를 보낸다. '정열'이라는 단어가 이만큼 잘 어울리는 공연을 본 적이 없다.
이 공연장이 왜 단체관객을 받지 않는지, 소극장에서 공연하는데도 왜 세비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한지 알 것 같다. 플라멩코 댄서는 나이가 들수록 그 깊이를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플라멩코를 이루는 세 가지 요소, 노래에도 기타 선율에도 춤에도 삶의 애환이 애잔히 녹아있다. 예쁘고 아름답기보다는 숨 가쁘고 열정적이다. 이런 춤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가녀린 몸매의 어린 댄서일 수가 없는 것이다.
공연 중에 사진을 찍을 수 없고 단체로 공연하는 마지막 무대만 카메라가 허용된다. 사진에 이 공연의 마지막 '정열'을 담아보지만 서투른 솜씨로는 어림도 없다. 그렇게 춤과 노래가 끝날 무렵 시작된 박수는 그칠 줄 모르고 작은 공연장은 열기로 가득하다.
이왕 스페인에 왔으니, 그것도 안달루시아 지방을 여행 중이니, 게다가 축제 중의 세비야에 머무르고 있으니 약간은 의무감으로 예약한 공연이었다. 이렇게 멋진 공연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오늘의 감동이 줄어들었을까?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기타의 선율, 숨 넘어갈 듯 애잔한 가수의 목소리, 무대를 가득 채우는 댄서의 몸짓이 발로 손으로 튕기는 리듬에 어우러진 공연은 가히 '정열' 혹은 '열정'의 다른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