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 화려한 부활절 축제, 세마나 산타
부활절 축제(세마나 산타, Semana Santa)의 이틀째 날이 밝는다. 숙소도 세비야의 구시가에서 약간 벗어난 외곽이라서 대성당이 있는 승리의 광장(Plaza del Triunfo)까지 걸어서 나간다. 거리는 아침부터 축제의 흥겨움에 들썩이고 있다.
파란 하늘과 건물마다 빨간 휘장이나 꽃으로 치장한 거리는 축제 기분을 북돋워 준다. '세비야의 이발사 서곡'을 눈으로 보는 기분이 든다.
세비야의 랜드마크인 세비야 대성당(Catedral) 먼저 들어가려고 하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문은 닫혀있고 사람들이 앞에서 웅성거린다. 하필 화요일인 오늘은 성당이 문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페인어로 쓰여 있는 안내판을, 스페인어를 아는 어떤 관광객이 사람들에게 말해줘서 알게 된 것이다. 영어 안내판을 찾을 수 없는 스페인어권의 나라에서는 불편함이 크다. 다음 스페인 여행은 꼭 스페인어를 배워서 올 테다.
어쩔 수 없이 계획이 바뀐다. 대성당이야 세비야 구시가를 누비다 보면 자주 들르게 되는 곳이니 내일 아침을 기약한다. 할 일이 사라진 터라 대성당 앞에 잠시 앉아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다가온다. 그녀는 다짜고짜 약초를 들이밀며 내 손에 쥐어주려 한다. 손금을 봐주겠다는 것이다. 이들이 집시이고,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운명을 이야기하고 나서 돈을 요구한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자연스레 손을 뿌리치고 뒷걸음을 치게 된다. 그리고 보니 대성당 앞은 이런 집시 아주머니들의 아지트다. 누구든 그녀들의 손길에 걸려 나뭇잎을 쥐게 되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성스러운 부활절 축제, 그 대표 격인 대성당 앞의 풍경이 기이하다.
오전의 세비야 거리는 평온하면서도 축제의 기운에 한껏 들떠있다. 대성당에 입장할 수 없으니 대신 주위를 돌아보게 된다. 밖에서 쳐다보는 카테드랄(Catedral)은 웅장하고 고풍스럽다. 스페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당인 이곳은, 바티칸의 산 삐에뜨르 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성당 다음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이라고 한다.
히랄다 탑(La Giralda)은 12세기 이슬람교도들이 세운 것으로 대성당 부속건물이다. 가톨릭의 교회에 이슬람교도의 탑이 공존하는 대성당, 4월의 따가운 햇살이 축제의 세비야를 빛낸다. 그냥 대성당에 입장했으면 대성당의 외관을 이렇게 눈여겨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새옹지마다.
대성당이 있는 승리의 광장 장 북쪽 산타크루스 지구(barrio de santa Cruz)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돌린다. 17세기 세비야 귀족들이 살던 거리인 구시가는 세비야의 옛 모습을 보여 준다. 작은 골목마다 기념품 가게와 레스토랑 등 여행자 편의시설이 줄을 서 있지만 스페인 남부 지방 안달루시아의 특유의 건물이 많다. 인파가 몰린 곳을 따라가다 보면 교회를 몇 군데나 들르게 된다. 어느 곳이나 북새통이 따로 없다. 아이들이 안내를 해주는 곳도 있고 방문객에게 스티커를 붙여주기도 하는 등 세마나 산타의 분위기가 무르익는 한낮이다.
이번 여행에서 가톨릭 국가들을 많이 방문하게 되고 30일간 걸은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역시 가톨릭의 순례길이라 많은 성당과 교회들을 지나왔다. 하지만 축제 중의 세비야에서는 색다른 느낌이 든다. 부활절 축제의 한 가운데에서 들러본 교회들은, 교회 자체보다 그 많은 사람들로 인상에 남는다.
골목을 따라 산타크루스 지구의 언덕을 오른다. 전통적인 하얀 집의 대문 안쪽으로는 이 지방 특유의 아름다운 안뜰이 보인다. 연중 태양이 따사로운 스페인 남부, 이슬람교와 가톨릭, 아프리카와 유럽 문화를 향유한 곳이 바로 이곳 안달루시아 지방임을 바로 인식하게 된다.
언덕 위까지 올랐다가 플라멩코 공연 예약을 마치고 광장으로 돌아온다. 한낮으로 접어들자 거리는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어쩌다 지나치는 동양인 관광객들에게서 한국말이 들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아직 4월인데도 안달루시아의 햇빛은 무섭게도 뜨거워지고 사람들은 그늘을 찾는다. 슬슬 자리를 잡고 멀리서 울려오는 퍼레이드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시내를 돌아 대성당 앞으로 오는 행렬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든다. 오후 3시쯤 되니 멀리서 행진해 오는 소리가 가까이 들려온다. 북소리의 리듬에 맞춰 심장도 쿵쿵쿵 울린다. 부활절 축제는 16세기 이래 카톨릭국가인 스페인 전역에서 열리는 유일한 축제라고 한다. 그중 가장 성대한 축제가 세비야에서 열린다고 하니, 그야말로 장관이다.
예수의 고난을 묘사한 조각상이나 성모 마리아, 예수의 조각상 등으로 이루어진 퍼레이드가 천천히 움직여 온다. 그 뒤를 뾰족한 모자를 쓰고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따라 걷는다. 거리는 이미 축제의 장이다.
여기에 참여하는 것이 아마 큰 영광인 듯, 행렬에는 아이들도 많다. 아이들이 행렬을 따르면 부모들을 그 행렬을 따라가면서 아이들은 챙긴다. 이미 퍼레이드를 끝낸 아이들은 옆으로 빠져나와 소풍이 끝난 표정으로 음료를 마시기도 하고 놀기도 한다. 부활절 축제의 중심에는 이렇게 퍼레이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세비야 사람들이 있다.
퍼레이드를 하는 사람들은 각 소속 교회마다 다른 복장이다. 원뿔 모양 모자를 쓰고 얼굴을 가린 참회자의 모습으로 걷는다. 어떤 어른들은 아예 맨발로 걷기도 하지만, 양말을 몇 겹씩 신고 신을 신지 않은 아이들도 있다. 자세히 보니 조각상을 실은 마차에는 바퀴가 없다. 마차 아래에 사람들이 들어가 등을 구부려 움직이는 것이다. 예수의 고난을 이 정도 나마 흉내라도 내보는 것일까?
대로를 지난 행렬들은 골목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집집마다 발코니에 빨간 천을 달아 축제 분위기를 내기도 하지만, 그렇게 장식된 발코니가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행렬을 내려다본다. 거기에 수많은 관광객과 현지인들이 따르고 있다. 바로 어제 숙소 근처에서 봤던 모습이다. 이렇게 골목을 돌아서 대성당으로 가는 것이었다.
축제는 밤까지 계속될 것이기에 잠시 사람들과 북소리에서 멀어지기로 한다. 구시가의 북적임이 사라지고 갑자기 고요해진 오후의 강바람이 반갑다. 강변의 황금의 탑(Torre del Oro)에 다다른다. 마젤란이 세계 일주를 떠난 항구였던 황금의 탑은 지금은 해양박물관이 되어있다. 대항해시대의 영광은 포르투갈에 이어 스페인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세계를 지배하던 이베리아 반도의 역량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황금의 탑에 꼭대기에 올라 과달키비르 강과 세비야 시내를 조망한다. 건너편 신시가는 현대적인 대도시가 펼쳐져 있지만 이쪽의 구시가는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황금의 탑에서 내려오니 길어진 그림자와 차가워진 강바람이 반긴다. 강변의 벤치에서 엽서를 쓴다. 여행자의 하루는 신기하고 낯선 것들로 채워져 흥미진진하지만, 이렇게 멈추어 있는 시간에는 교감할 사람이 그립기도 하다. 이미 많이 단련됐지만, 그리움을 겪어내는 것, 외로움을 수용하는 것이 혼자 하는 여행의 묘미이기도 하다.
해지는 거리에 행렬이 계속되는 걸 보면서 대성당 근처로 돌아간다. 예쁘게 차려입은 여자들, 멋 내고 나온 남자들, 귀여운 아기들, 어린이들과 유모차를 끌고 나온 가족들, 그리고 여행자들까지, 거리에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 종교가 사람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구심점이라는 것을 이미 인도에서 많이 경험하고 왔지만, 여기 스페인의 그것은 같으면서도 다르게 느껴진다. 스페인에서 이렇게 많은 스페인 사람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전에 예약한 플라멩코 공연까지 보고 나오니 밤이 깊다. 인파 속에서 퍼레이드를 지켜보다가 황금의 탑에 다녀와서 또 퍼레이드를 보고 플라멩코 공연까지 보고 왔는데, 퍼레이드는 그칠 줄 모른다. 밤이 깊어갈수록 사람들은 더 많아질 뿐이다.
야심한 시각인데 사람들은 마치 한낮이라는 듯이 거리를 활보한다. 아직도 어딘가에서 둥둥 북소리가 울리고 퍼레이드는 계속된다. 각국의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가게마다 사람들이 가득하다. 축제가 절정인 늦은 시각이어도 술에 취한 사람은 볼 수 없다. 이렇게 밤을 지새운다 해도 거리는 안전하고 사람들은 건전하고 축제는 계속될 것이다. 일주일간의 부활절 축제를 하루에 다 치른 듯하다. 축제 같은 하루가 아닌, 진짜 축제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