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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예쁜 마을, 쉐프샤우엔의 첫 밤

[쉐프샤우엔] 야경 먼저 보게 된 모로코의 산골마을

by Girliver

오아시스 도시 마라케시, 대서양의 어촌 마을 에싸위라, 경제수도 카사블랑카, 고대도시 페스를 지나 오늘은 이름도 예쁜 쉐프샤우엔(Chefcaouen)이라는 산골마을로 간다. 쉐프샤우엔은 모로코에서 만난 여행자들마다 꼭 가보라고 권하던 곳이다. 눈여겨 볼만한 유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련된 대도시도 아닌 모로코 북부 산골마을로 가는 버스에는 배낭을 진 여행자만 열 명이 넘는다. 다들 나처럼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여행자들을 끌어들이는 쉐프샤우엔은 대체 어떤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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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푸른 하늘과 사람 손이 가지 않은 들판이 바로 앞에 펼쳐진 간이 터미널에 하루에 차가 몇 대나 들를까? 흰 구름 떠 있는 하늘의 푸른빛과 들판의 초록빛이 시야를 틔워준다. 모로코에서는 지금까지 사막과 바닷가 마을, 대도시들을 다니다 보니 쉐프샤우엔으로 가는 길은 이제껏 모로코에서 달린 적이 없는 산길이다.


주유소와 식당이 있는 간이 터미널에 버스가 선다. 식사를 하라는 말이다. 4시간만 달리면 되는 길이지만 서두르지 않고 쉬면서 가는 여유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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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휘발유가 있을까 싶은 주유소에 도착한 차가 연료를 넣고 식당에서는 양꼬치가 흰 연기를 내며 구워진다. 하늘은 파랗고 햇살은 따갑고 사방은 고요하다. 꾀죄죄한 차림의 여행자들은 경치나 보며 느긋이 출발 시간을 기다리는 중이다.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을 보는 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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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프샤우엔 터미널에서 택시를 잡아 숙소 주소를 보여준다. 모로코 어디서나 택시 기사와의 실랑이가 어려웠는데 여기서는 똑같이 택시비 흥정을 해도 기분 좋게 웃고 있는 기사의 얼굴 때문에 나도 웃지 않을 수 없다.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호스텔이라 찾기 쉽지도 않은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물어서 바로 앞에 내려다 주고 돌아가는 택시가 정겹게 느껴진다. 이곳 사람들이 순박하다고들 하지만, 작은 산골마을의 경치가 내 마음도 착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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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인 노부부가 운영하는 프랑스식 이름의 호스텔은 일층은 가정집이고 이층과 삼층이 호스텔이다. 영어는 한 마디로 못하시지만 프랑스 사람만큼 멋지게 불어를 쓰시는 할아버지가 방을 안내해 주신다. 8인실 도미토리 안에 침대 두 개가 채워져 있다. 나 말고 두 사람이 더 머물고 있는 것 같다. 나머지 침대 다섯 개는 비어있는 깨끗한 방에 짐을 푼다. 비수기라서 그런지 가는 곳마다 여행자가 많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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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M도 찾고 허기도 채울 겸 숙소를 나선다. 숙소가 있는 곳은 메디나 바깥인데도 파란 빛깔로 칠해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쉐프샤우엔은 메디나의 건물들이 모두 파랗게 칠해져 유명한 마을이다. 모로코에는 프랑스와 스페인 식민지이던 역사의 영향으로 프랑스어를 잘하는 노인들이 많고 이곳 쉐프샤우엔도 스페인 사람들이 휴양지로 드나들다가 유명해진 곳이다.


도미토리지만 분위기는 가정집 같은 푸근한 숙소로 돌아온다. 손님이 없는 것인지 아직 들어오지 않은 것인지 사람도 없는 거실에서 충전도 하고 책도 읽으며 우리 집인 것처럼 편하게 앉아있는데 아래층에서 시끌벅적 웃는 소리가 들린다. 방을 함께 쓰는 두 여자가 들어온 것이다. 여느 도미토리에서 그렇듯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통성명을 한 후 하던 일을 계속한다. 9시가 넘는 시각에 숙소에 돌아온 이들이 샤워를 마치고 몸단장을 하더니 함께 저녁 먹으러 나가겠느냐고 묻는다. 배가 고픈 것은 아니지만 딱히 할 일도 없어 심심하던 차에 함께 나가기로 한다. 사실 혼자 여행한다고 그렇게 적극적으로 말 걸어주는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가 흔한 일은 아니기에 고마운 마음으로 따라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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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버지니아가 데리고 간 곳은 메디나 입구의 광장 앞 레스토랑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웨이터와 낮에 약속을 해 두었다고 한다. 그가 일을 마치고 만나기로 해서 시간이 늦어진 것이다. 우리 숙소의 주인 할아버지가 프랑스어를 하시는 것처럼 이 사람은 스페인어를 잘한다. 민트 티를 마시며 그를 기다렸다가 밤에도 문을 연 다른 식당으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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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는 스페인의 말라가 출신으로 소꿉친구인 둘이 휴가를 맞춰서 모로코 여행 중이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사람 특유의 활기 넘치는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마리아는 마드리드에서 직장을 다니고 버지니아는 간호사인데 스페인에 일자리가 없어서 독일에서 일한다고 한다. 모신은 쉐프샤우엔의 카스바가 있는 광장 앞 레스토랑의 웨이터다. 그의 모로코인 친구까지 합석해서 다섯이서 저녁을 먹는다. 혼자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과 처음 보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밥 먹는 일은 여행이 아니라면 절대 못했을 일이다. 배낭을 지고 언어가 다른 곳으로 오게 되면 그 배낭에 짊어진 자유만큼 사람도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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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산골의 작은 마을이라 해도 아직은 낯선 곳인데, 야경을 즐기며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여행 이야기를 나누며 앉아있으니 지금 내 앞의 사람들이 너무도 고맙다.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던 고즈넉한 산골의 첫 밤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 예상할 수 없었으니 이 유쾌한 스페인 처녀들과 한 방을 쓰게 된 것은 내게는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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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넘었는데 모로코 남자들과 스페인 여자들은 술을 마시러 바(Bar)로 간다고 한다. 이슬람 국가인 모로코의 산골에 술집이 있을 거라고 상상해보지 않았지만 바가 두 군데나(!)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모로코 현지인과 함께라서 가능한 일이다. 불 꺼진 조용한 거리의 어느 가게로 들어가니, 이미 술에 취한 모로코 사람들이 흥청거리고 있다. 소박하고 청초한 쉐프샤우엔 풍경과는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 난장판이다.


그곳은 곧 문을 닫는다고 다른 술집으로 이동하자고 해서, 야밤의 술집 투어가 그리 탐탁지 않은 나는 숙소로 돌아가기로 한다. 밤이 깊어 어둡고 길도 몰라서 그들이 나를 호스텔에 데려다주면서 버지니아는 구두를 운동화로 갈아 신고 가기로 한다. 새벽 두 시, 1층은 가정집인 우리 호스텔의 벨을 누르니 주인 할아버지가 자다 깬 얼굴로 문을 열어주신다. 잘 놀다 오라고 인사를 해주고 얼른 샤워를 하고 나오니 바에 간 줄 알았던 마리아와 버지니아가 방에 들어와 있다.


야심한 시각에 스페인 여자들을 기다리는 것을 본 호스텔 주인 할아버지가 모로코 남자들에게 야단을 치니까 내일 만나자며 풀이 죽어서 돌아갔다는 것이다. 노인의 호통이 무서워 꼬리를 내리고 도망치듯 사라지는 모로코 남자들이 안됐다면서도, 마리아와 버지니아는 그 상황이 우습다고 배꼽을 쥔다.


아직은 그 진면목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곳이 어른들의 호통이 통하는 세상이라는 게 왠지 마음을 편하게 한다. 야경부터 보게 된 쉐프샤우엔이 보여줄 모습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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