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 여행] 진짜 쉼을 원하다면 "므앙 응오이"
카르스트 지형의 높은 산들과 황톳빛 강물 사이, 섬은 아니면서도 육지와 도로로 연결되지 못해 오로지 배로만 출입할 수 있는 오지마을 '므앙응오이(Muang Ngoi)'. 라오스에서 '므앙'은 마을을 뜻한다. 므앙응오이는 인구가 800명쯤 된다는 작은 마을이다. 그나마 배낭여행자들이 찾아온다는 이유로 2014년에야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몇몇 게스트하우스와 식당들이 생겼다는 곳이다.
농키아우 선착장을 출발한 배는 므앙응오이로 향한다. 흙색 강물과 안개가 걷히고 있는 파란 하늘, 카르스트 지형의 높은 산이 특색 있는 풍경을 만들고 있다. 멀어졌다가도 손에 닿을 듯 다가오는 풍경은 가본 적도 없는 하롱베이나 장가계를 괜히 폄하(?)하게 할 만큼 멋지다.
선착장 바로 옆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푼다. 우강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는 해먹이 달려 있고 새것이나 다름없는 침대 두 개짜리 목욕탕 딸린 독채가 70000낍, 우리 돈으로 만원이 되지 않는다. 게스트하우스라 봤자, 행인들의 음성마저 그대로 들려오는 나무집이다. 시골마을의 저녁은 금세 어두워진다. 전날 루앙남타에서 빡몽을 거쳐 농키아우까지의 이동이 힘들었던 우리는 금방 곯아떨어진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더니 해가 뜨기도 전에 눈이 저절로 떠진다. 안개가 자욱한 아침, 선착장에서는 부지런한 여자들이 벌써 빨랫감을 세탁하고 있다. 알싸한 아침 공기가 폐로 스미는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흙길 위에서는 행인 따위는 안중에 없는 닭들이 땅을 헤집는다. 누가 누구의 어미이고 새끼인지 바로 알 수 있는 개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사람들이 나오면 아침 인사라도 하듯 반갑게 꼬리를 흔들면서 따라간다.
어제 눈여겨 보아둔 길모퉁이 식당으로 간다. 오지마을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조식 뷔페(?)가 새벽 골목의 흙길 위에 차려져 있다. 라오스에서 흔한 빵과 과일, 계란프라이가 놓인 상차림이지만 아침의 노천 식탁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우리처럼 일찍 아침을 먹는 여행자들이 예닐곱은 되니까 뒤에 올 사람들까지 합하면 그럭저럭 장사는 되겠다 싶다. 므앙응오이 전체가 호텔인 듯, 골목 모퉁이가 조식을 먹는 레스토랑인 듯 호사스럽게 느껴진다.
느긋한 아침 식사 후에도 긴 하루가 오롯이 남는다. 셔터를 올리고 물건을 진열하느라 분주한 가게 주인의 손길이 눈에 들어온다. 몇 개 안 되는 물건이 하루에 얼마나 팔릴까 한숨이 나오지만 정작 주인의 얼굴은 느긋하다. 마을 사람들 몇몇은 나무로 만든 허름한 집 앞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길가에서는 아이들이 놀고 있다. 동행이 주는 사탕을 얼른 받아 입에 넣고 웃어 보이는 얼굴이 천진난만 그 자체다. 말이 안통하니 판토마임 하듯 놀아주다가 꼬마들 손에 사탕 몇 개를 더 쥐어주고 일어선다.
어딜 가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발길 가는 대로 흘러가는 가벼운 발걸음이 느려지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먼 산이 그대로 보이는 흙길 위에는 나와 동행만 먼지를 날리며 걷는다. 목적지가 있는 발걸음도 아니라서 말없이 천천히 걷게 된다. 산이 거기에 있고, 그 산 뒤의 산도 그곳에 있고, 강물은 흐르고 있으며, 사람도 동물도 어제처럼 그 속에 살아가고 있다.
걷다보니 파노이동굴(Phanoi Cave)로 가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할 일도 없던 차에 오지마을의 이정표가 반갑기도 해서 동굴에나 가보기로 한다. 숲길을 걸어 동굴 입구에 도착하니 간이매표소가 있다. 입장료를 받은 관리인이 무심한 얼굴로 열쇠를 가져온다. 허름한 나무문에 걸린 자물쇠가 풀리고 비밀의 화원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레 문이 열린다. 무엇이 있는지 왜 가는지도 모르고 얼떨결에 이곳에 도착한 우리는 천천히 동굴을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대나무 난간이 있기는 해도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은 데다가 나무뿌리와 바위가 얽힌 길은 생각보다 험난하다. 바위 표면은 매끄럽지 않고 뾰족뾰족하다. 이곳이 카르스트 지형이라더니 석회암이어서 침식이 많이 된 것인지 얕은 지식으로 예측만 할 뿐이다. 생각보다 고도도 높고 가파른 길을 오르자니 힘이 든다. 예기치 못한 험난한(?) 산행이다. 멈출 설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땀을 훔치며 오르다 보니, 어느새 뷰포인트에 이른다. 작은 마을과 선착장, 흐르는 강물과 우뚝 솟은 산들이 한눈에 펼쳐진다.
그런데 찾아온 파노이동굴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조심조심 내려가다 보니, 길 옆 작은 틈새로 석회암 동굴이 보인다. 설마 저 동굴은 아니겠지, 가다 보면 좀 그럴싸한 동굴 입구가 나오겠지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컴컴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앞의 조잡한 불상 사진이나 찍고는 결국 그 앞을 지나치게 된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하리. 본의 아니게 트레킹까지 하게 된 것으로도 이미 대단한 하루가 되었다. 얼떨결에 산행까지 하고 나니 허기가 진다. 남는 것이라고는 시간 밖에 없어서 굳이 강이 보이는 식당을 찾아간다. 점심시간이 지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사람이 없는지 손님이라고는 우리뿐이다.
늦은 점심 후에는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 해먹에 누워 게으른 오후를 보낸다. 인터넷 너머의 한국에서 지인들이 말을 건다. 부는 바람이 시시각각 어떻게 달라지는지, 머리 위를 내리쬐는 태양빛이 언제 뜨겁고 언제 부드러워지는지를 단문의 메시지로 전할 재주가 없다. 시공을 초월한 편리함이 은근히 불편해진다. 므앙응오이에 머문다면 스마트폰은 꺼두는 게 좋을 거라고 중얼거리며 스마트폰을 슬쩍 밀어 놓는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잠깐 조는 사이, 높은 산은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한결 부드러워진 햇빛을 받은 잔물결이 반짝이고 있다. 스스럼없이 옷을 벗고 몸을 씻는 아이들을 검은 개가 지켜보는 선착장에 나른한 바람이 분다.
할 일이 없으니 먹는 것이 꽤 커다란 부분을 차지해서 삼시 세 끼는 꼭 챙겨 먹게 된다. 점심을 먹었던 숙소 옆 식당에 다시 가서 기약 없이 느리게 서빙되는 식사를 기다린다. 라오스의 주식인 카오냐오(찰밥)와 가늘게 썬 고기에 향신료와 멸치액젓 비슷한 남빠라는 소스를 넣어 볶은 쌀위에 뿌린 랍을 주문한다. 각종 채소와 생선, 코코넛을 넣고 끓인 매운탕 비주얼의 수프도 한 자리를 차지한다. 카오냐오와 랍은 먹을 만하지만, 빨간 코코넛 수프의 말할 수 없는 달콤함에는 익숙해지지 못한다. 이럴 때 비어라오는 느끼함을 가시게 하기엔 제격이다. 이래저래 비어라오는 끼니마다 한 잔씩 마시지 않을 수가 없다.
몇 안 되는 여행자가 강변식당으로 모여든다. 그들도 할 일 없는 하루를 즐기다가 끼니를 챙기러 나왔을 것이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강변에서 지그시 풍경을 만끽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일몰만큼이나 아름답다. 붉은 해가 자취를 감추더니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는다. 낮에는 황톳빛이던 강이, 태양이 사라진 하늘과 검은 산그림자를 그대로 비추고 있다.
육지라고도 할 수 없고 섬도 되지 못한 라오스의 오지, 흐르는 강물처럼 느려진 시간 속에서 '텅 빈 나'를 대면할 수 있는 곳, 어쩌면 그 존재조차 마음 놓고 잊어버릴 수 있는 곳, 진짜 '쉼'을 원한다면 므앙응오이로 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