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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엘공원 그리고 마지막 '메뉴델디아'

[바르셀로나]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여정

by Girliver

화창한 아침, 산들바람을 맞으며 구엘공원(Park Guell)으로 간다. 이곳은 바르셀로나에서도 고지대다. 구엘공원은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중심 부분과 주위를 둘러싼 산책로가 있다. 구엘공원을 둘러싼 산책로에는 입장시간을 기다리면서 산책로를 걷는 사람이 많다. 티켓을 사서 입장하는 줄 알고 왔지만 역시 예약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예약을 하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은 티켓팅을 한 후 정해진 시간에 입장이 가능한데, 사람이 많아서인지 삼십 분쯤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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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엘공원의 정상에는 십자가 모양의 전망대가 있다. 입장 시간까지 할 일도 없어 산책로를 걷다가 전망대에 올라 바르셀로나의 마지막 전경을 바라본다. 언덕 꼭대기에 쌓여있는 돌무덤이라 오르내릴 때도 조심스럽지만 전망은 좋다. 시내뿐 아니라 멀리 바르셀로나의 바다까지 보인다.

어느 전망대에서 봐도 단연 눈에 띄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는의 네 개의 첨탑과 더 높이 솟아오른 크레인은 가히 바르셀로나의 랜드마크다. 가우디의 작품을 다 보고 나면 바르셀로나의 속살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스쳐가는 여행자에게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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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의 돌기둥만 봐도 벌써 감탄이 쏟아진다. 자연과 닮은 건축을 표방했다는 가우디의 신념이 그대로 나타난다. 비스듬히 기대어 아치를 그리는 돌기둥들이 나무줄기와 뻗어나간 가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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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돌을 기반으로 중간 크기의 돌, 작은 돌들을 차례로 쌓아 만들어진 축대 위에는 꽃과 야자수가 피어나고 그 앞에는 노천식당이 행인의 발걸음을 잡아끈다.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다니고 여기서 바라보는 구엘공원과 바르셀로나 전경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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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엘공원 입구는 놀이동산 같다. 누가 먼저 부르지 않아도 그 별명이 "과자의 집"일 것 같은 동화 속 건물이 입구를 장식하고 서 있다. 왼쪽은 수위실이고 오른쪽 건물은 사무실의 용도이다. 세상에 이렇게 예쁜 수위실과 사무실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고 싶다. 같은 일도 아름다운 공간에서 한다면 훨씬 능률이 오를 것이다.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두 개의 계단과 가운데의 신전, 그리고 양 옆의 타일로 장식된 벽이다. 구엘공원의 원래 용도는 부자들을 위한 고급 전원주택단지였다고 한다. 가우디의 후원자인 구엘의 자본으로 짓기 시작한 곳이다. 굴곡이 심한 산등성이의 자연을 최대한 살리면서 작업한 결과가 바로 구엘공원이다. 기둥이 늘어선 신전으로 보이는 곳은 본래 시장의 용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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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따라 오르면 뱀의 얼굴이 카탈루냐의 상징인 줄무늬 문양 위에 물을 뿜고 있고 그 위쪽에서는 형형색색의 타일 조각으로 만들어진 도마뱀의 입에서도 물이 흘러나온다. 구엘공원의 타일 장식들은 앙증맞기도 하다. 타일을 깨뜨려 조각을 내고 그 조각을 다시 붙인 가우디의 모자이크들이 만들어 내는 벽, 분수대, 의자들이 너무 아름답고 황홀하다. 흰 색 바탕에 수놓아진 색색의 타일 조각이 이곳을 신세계의 풍경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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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신전처럼 보이는 시장 공간의 그늘에서 기둥 사이를 돌아본다. 따가운 햇살이 사라진 그늘에 바람이 불어온다. 삼면이 트여있는 이 공간은 사람들이 자주 오가게 되는 곳이니 시장의 용도로 쓰일만하다. 신전의 모습을 한 시장이라니, 아이러니하면서도 신선하다. 이 촘촘한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해하며 옆 계단으로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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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서 보니 신전의 기둥들은 마당을 이고 있다. 타일로 장식된 벤치가 신전을 가장자리를 따라 물결모양으로 굽이치고 있고 그 안은 운동장 같은 넓은 마당이다.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특별하게 느껴질 만큼, 나에게는 전무후무한 아름다운 광경이다.

파도가 일렁이듯 물결치는 곡선의 벤치가 삼면을 둘러 이어지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벤치들은 모두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깨진 타일을 붙여 창조된 그림들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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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 깨진 타일들의 비상한 색감이 면과 손잡이의 곡면까지 채운다. 멀리 보이는 바르셀로나 시내의 각진 건물들도 이곳의 부드러운 곡선과 타일 조각의 반짝임으로 그림의 일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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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넓은 마당을 돌아다니다 어린이들을 마주친다. 그림을 그리거나 보고서 같은 것을 쓰고 있는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엎드려 연필 쥔 손이 움직이는 모습이 예쁘기만 하다. 이런 독창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한 건축물을 도처에서 접하고 피카소, 달리, 미로 같은 대화가의 그림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바르셀로나의 아이들이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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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앞으로는 바르셀로나 시내가 펼쳐지고 뒤편은 산등성이에 기대어 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을 표방하던 가우디는 자로 잰 것 같은 직선이 아닌 자연의 곡선을 구현했다고 한다. 이슬람의 곡선은 정교함에 매혹되지만 가우디의 곡선은 편안하면서도 아름답다. 가우디의 건축에 감탄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발길은, 그가 추구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에 대한 공감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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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서 나와 꽃밭 사이를 지나 가우디가 만들어 놓은 산책로를 걷는 다른 방문객들을 바라보는 것으로도 마음이 편안하다. 무릉도원 같은 이런 공간에서 살게 된다면 그 아름다움이 사람들을 너그럽게 할 것도 같다.


실상은 건축 도중 건축주 구엘이 죽고 그 후 구엘의 아들이 팔아 버렸다는 구엘공원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부자들의 주택단지로 지어졌다니 그 시대 평범한 사람들은 저 아래 보른 지구의 중세 골목 어딘가에서 살아야 했을 것이다. 까사밀라도 까사 바뜨요도 구엘공원도, 부유한 자에게만 편리하고 아름다운 "건축"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건축은 비용이 엄청난 예술이니 말이다. 그래서 말년의 가우디는 부자들을 위한 건축을 중지하고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성전건축에만 전념한 것이라고도 한다.

어디가 자연의 나무인지 무엇이 돌덩이를 쌓아 올린 산책로의 기둥인지 모호해지는 고요한 풍경 속을 걷는다. 가우디는 자연의 곡선을 인간의 건축으로 실현해 내었다. 부자들의 안식처가 되지 못한 구엘공원은 무료 개방되다가 2013년부터 주요 부분만 유료로 바뀌었다고 한다. 완성되어 부유층만의 전유물이 되지 못한 구엘공원의 역사가 오히려 고맙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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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엘공원에서 나오기 전에 들른 사무실 건물에서 엽서들을 발견한다. 그렇게 예쁘게 찍고 싶었던 가우디의 작품들이 전문가의 손길로 아름답고 선명하게 촬영되어 있다. 관람객이 없는, 멋진 각도의 사진이 담긴 엽서보다 내가 찍은 사진이 좋다. 사진마다 여행자들이 분주하고 알맞은 구도도 아니고 서투른 사진이지만, 바르셀로나에 와서 가우디의 작품을 만지고 보고 느낀 흔적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았기 때문이다.

한나절을 구엘공원에서 잘 보냈다. 나오는 길에 기념품 몇 개를 사가지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간다. 가이드북에서 추천된 현지인의 맛집이라는 식당을 찾아간다. 관광지는 아니지만 호스텔에서도 멀지 않아 가기는 쉽다. 평일의 오후 사람들을 기다리거나 햇볕을 쬐고 있는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평화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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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식당을 찾았다. 저렴하고 맛있는 곳이어서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많다더니, 들어가서 이름을 예약 명단에 올리고도 소파에서 한참을 대기하다가 자리를 잡는다. 평일의 늦은 점심인데도 사람이 줄을 서 있는 걸 보니 맛집이 맞는 것 같다. 늘 그렇듯 2인용 테이블에 혼자 앉아 음식을 주문한다.


2월 말에 스페인에 도착해서 산티아고 길을 걷고 마드리드를 여행한 후 포르투갈과 모로코 여행을 거쳐 다시 스페인으로 들어와 여행했다. 지금은 오월, 스페인은 나에게 잊지 못할 나라가 되었다. 그런 스페인에서 오늘 떠나는 날이라 이제는 먹지 못할 메뉴 델 디아(Menu del Dia : 오늘의 메뉴)를 마지막으로 주문한다.


하우스 와인의 취기를 즐기며 호스텔에 맡긴 배낭을 찾아 공항으로 향한다. 많은 것을 알게 되어버린 아름다운 바르셀로나를 이륙한 비행기는 북쪽으로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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