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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liver Jun 15. 2016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체코의 동화마을 체스키크룸로프를 걷다

메트로에서 만나는 체코인들의 표정은 무표정하다. 오월도 중순에 접어들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아직 두꺼운 무채색의 옷을 입고 무덤덤한 얼굴로 앉아 있다. 며칠 전까지 스페인의 따뜻한 햇살과 밝은 표정의 사람들을 보다 와서 그런지 내게는 그 표정들이 더욱 대비된다. 

안델 역에 내려 체스키크룸로프(Cesky Krumlov)행 버스를에 오른다. 와이파이가 되고 승무원이 커피와 비스킷을 서빙해주는 버스라 쾌적하다. 오랜만에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카톡대화를 할 수 있으니 이동시간이 지루하지도 않다. 

버스가 세 시간여를 달리는 동안 창밖이 흐려지더니 급기야 비가 내린다. 분명 화창한 프라하의 하늘을 보고 출발했건만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비는 더 굵어져 있다. 길도 몰라 난감한데 오늘이 일요일이라 이 버스터미널은 작은 대합실만 열려있고 화장실이고 사무실이고 다 잠겨있어 물어볼 사람도 없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의 목적지가 모두 체스키크룸로프이니 다른 사람들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간다.   

과연 버스터미널에서 가까운 곳에 광장이 나온다. 이곳은 중앙광장이다. 13세기에 형성되었다는 광장은 파스텔톤의 중세식 건물들이 아기자기하게 서 있다. 분수대의 조각품은 페스트 퇴치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니 유럽의 중세도시에 온 것이 실감이 난다.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 비가 내렸던 것 빼고는 여행 중에는 날씨 운이 항상 좋았는데 오늘은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비옷을 입거나 우산을 써야 할 정도로 내리는 비 탓에 돌아다니는 것이 쉽지 않다. 프라하에서 세 시간이나 걸려서 이곳에 왔으니 비만 피하고 있을 수는 없어서 개의치 않고 아름다운 마을을 둘러보기로 한다.   

체스키크룸로프는 체코의 남부 보헤미아(Bohemia) 지방의 작은 도시다. 보헤미아 인들의 예술 감각이 살아있는 기념품 가게들이 줄지어 서있다. 아기자기하고 특이한 기념품들은 너무너무 비싼 가죽제품이기도 하고, 도자기 장식이나 유명한 그림의 모조품, 보석가게, 유명한 체코 맥주만 파는 곳 등등 셀 수도 없다. 


손님을 끌기 위한 간판마저도 세상에 하나뿐인 핸드메이드 작품이니 안 들어갈 수가 없다. 예쁜 건물들과 아기자기한 장식, 하나하나 정성이 배어있는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가는 곳마다 쌓여 있으니 지갑을 열지 않을 수 없다. 마을 전체가 관광객을 위해 만들어 놓은 놀이동산 같지만, 중세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 도시는 동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이 살아온 곳이다.

거리를 걷다가 매장에 진열된 물건들을 살펴보며 걸어가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 걸을수록 더 멋진 거리와 아름다운 풍경과 독특하면서도 예술적인 가게들이 튀어나오니 어쩔 수가 없다. 원래 이 도시는 이렇게 걷는 곳이다. 비가 내려도 거리에 여행자는 많다.

화창해도 좋았겠지만 잿빛 하늘이 선사하는 수채화 같은 풍경도 괜찮다. 걸을 수 있을 만큼 내리는 비가 오히려 고맙다. 폭우가 쏟아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이발사의 다리"라는 이름의 다리를 건너 성으로 들어간다. 다리 입구에는 프라하의 카를 다리에도 있는 얀 네포무크의 조각상이 있다. 조각상의 머리 뒤쪽의 원을 그린 황금별들이 이제는 익숙하다.

체스키크룸로프성은 체코에서는 프라하성 다음으로 큰 성이다. 길을 따라 올라보면 넓은 정원도 여러 개 나타난다. 비가 오니 발걸음이 가벼운 것은 아니어도 성 안에서 바라보는 마을 풍경은 커다란 위안이 된다.

성 안의 액자에 담긴 체스키크룸로프의 전경을 보면 이곳의 위치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중앙광장을 비롯한 마을은 굽이치는 물길을 품으며 섬처럼 존재한다. 다리를 건너면 어디서나 보이는 탑을 위시한 성이 자리 잡고 있다. 체스키크룸로프라는 도시의 이름도 이 지형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여행 전에 알고 있던 체스키클롬로프의 이미지는 뾰족한 탑과 빨간 지붕들이 모여 있는 중세의 마을에 블타바 강이 휘도는 풍경이었다. 파란 하늘이 아니어서 그렇지, 그 이미지가 그대로 눈앞에 펼쳐져있다. 여행이란 한 장의 사진이나 한 페이지의 책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상상을 초월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예상을 빗나가기도 하지만 오늘 체스키크룸로프는 날씨를 뺀다면 상상했던 이미지 바로 그것이다.

시대의 변천을 따라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등 각종 양식으로 지어진 성이 잘 보존되었다. 성과 마을이 옛 모습을 간직한 것은 체코가 과거 냉전시대에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발이 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약이 된 경우다. 


체코의 아름다운 풍경들만 보면 사회주의 체제의 근현대사를 상상할 수 없다. 이토록 로맨틱한 풍경 속에서 그처럼 건조한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곽의 문인 부데요비츠카 문까지 걸어와 빗속의 여행을 끝낸다. 그림 같은 작은 마을에서 며칠쯤 묵으며 휘도는 블라바강과 성을 바라보고 마을을 거닐고 싶다. 동화의 마을이라고 열심히 찾아왔더니, 아예 동화 속에 눌러앉고 싶어진다.  

수채화에서 빠져 나올 시간이다. 아름다운 마을을 뒤로하고 터미널로 돌아간다. 동행이 있어 걸음도 식사도 기다림도 편하지만 동의를 구해야 하는 사소한 모든 일들이 불편하게도 느껴지기도 한다. 진짜 나그네 다 됐다. 돌아갈 날이 성큼 다가왔는데 이제야 크눌프를 이해하게 되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돌아보니 성의 커다란 탑은 터미널에서도 바로 보인다. 도착하면서부터 줄곧 내리던 비는 떠나려 하니 그치는 중이다. 일요일의 터미널에는 직원이 한 명도 없어서 프라하로 돌아가는 표를 예매하지 않은 여행자는 발을 동동 구른다. 아름다운 체코는 친절하지는 않다. 프라하 관광지의 식당이 바가지를 씌우는 것으로 악명이 높고 환전 사기나 소매치기도 조심해야 한다지만 그런 일이야 차치하고라도 외국인 여행자가 많은 정류장에 흔한 안내문 같은 것도 없으니 말이다. 


6시에 출발한 버스는 밤 9시 반이 넘어서야 프라하에 도착했고 메트로를 타고 구시가 광장으로 왔을 때는 이미 열 시가 넘는 시각이다. 즐겁게 저녁식사를 하고 작별인사를 나눈 동행들이 저편으로 사라진 광장에 다시 혼자 남는다. 낯선 길에서는 어둠이 두렵지만 이미 익숙해진 광장에서는 상념만이 더해질 뿐이다. 여행은 끝을 향하고, 길 위의 마음도 많이 달라져 있다. 낯선 도시를 떠도는 일이 일상이 되었지만, 가슴 한편에서 스멀거리는 외로움이 여행에서 뿐 아니라 인생에서도 함께할 것임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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