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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liver Jun 18. 2016

볼수록 매력만점, 프라하의 월요일

알면 알수록 알고싶은 이야기

월요일 아침의 카를 다리는 의외로 인적이 없다. 며칠 동안 늘 인파 가득한 다리만 보았는데 오늘 아침의 느닷없는 고요가 너무 좋다. 체코의 세종대왕이라는 카를 4세가 건설한 카를 다리는 체코 전역에서 보내온 달걀노른자를 사암에 섞어 튼튼한 다리를 건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람이 별로 없는 덕분에 미술관의 조각품 관람하듯이 고딕 양식의 다리 위에 놓인 바로크 양식의 성상들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성 요한 네포무크의 성상이다. 네포무크는 왕비의 고해성사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왕에게 죽임을 당한 순교자다. 그가 블타바 강에 수장된 다음 날 강 위에 다섯 개의 별과 같은 광채가 떠올랐다고 하여 조각상의 그의 머리 뒤에는 다섯 개의 별이 있다.


네포무크가 수장당한 곳을 가리키는 섬세한 표식에는 수장되는 네포무크의 부조가 있다. 이 부조를 손으로 만지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전설 때문에 부조 속에 누워있는 작은 네포무크는 언제나 금빛이다.


성 요한 네포무크 조각상에 손을 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이곳에도 늘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특히 단체 관광객이 오는 시간은 줄줄이 손을 대고 인증숏들을 찍느라 항상 어수선하던 조각상 앞에 오늘 아침엔 아무도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없는 손길로 아예 칠이 벗겨져 금빛으로 보이는 부조 위에 살며시 손을 대본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다시 불어오지 않을 이 순간의 바람을 들이킨다.

체코는 마리오네트 인형극으로도 유명해서 어디를 가든 피노키오 같은 마리오네트 인형들이 많다. 긴 봉에 반죽을 감아 직접 구운 트래들로라는 빵을 파는 가게엔 손님이 넘쳐나고 턱받이 같은 아기용품에 그 자리에서 재봉틀로 이니셜을 새겨주는 가게도 있다. 손재주가 뛰어난  보헤미안들은 유명한 보헤미안 글라스나 예쁜 책갈피, 벽걸이도 만들어 판다. 어느 매장에 들어서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냥 기념품 가게에만 들어가도 그 아기자기함에 매료되어 한참을 서성이게 된다.

이제는 색다른 곳으로 가본다. 프라하 구시가 광장 근처에는 유대인 지구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구신 시나고그(Staronova Synagoga)로 가본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톱날 모양의 지붕이 뭐가 다른 분위기를 암시한다. 시나고그는 유대인의 예배당이다. 프라하의 유대인 지구에는 시나고그가 여러 군데 보존되어 있다.

 

사실 유대인이라는 단어에는 극히 얕은 지식만이 반응을 한다. 나치의 유대인 포로수용소, 홀로코스트, 영화 <쉰들러 리스트>, 세계 경제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 책 <탈무드>, 통곡의 벽 정도가 아주 단편적으로 떠오를 뿐이다. 그러니 프라하에 머무는 동안에도 관심이 가지 않았는데 밤차를 타기까지 시간 여유가 생기니 한번 가볼까 싶었다.

프라하는 유럽에서도 유대인이 많이 살던 도시라고 한다. 과거 유럽에서는 유대인을 기독교인과 분리해서 게토라고 부르는 유대인 지역에서만 강제로 거주하게 했다. 프라하의 게토를 요제포브(Josefov)라고 부르는데, 프라하의 유대인 지구가 보존된 이유는 기가 막히다. 나치의 만행으로 유대인들이 감소하자 히틀러가 이곳에 유대인 멸종 박물관을 세우려 했다는 것이다. 유대인을 학살한 사람이 보존한 유대인의 박물관이라니... 생각만 해도 히틀러의 잔인함에 치가 떨린다.


시나고그에 입장하지는 않는다. 배경지식이 너무 없어서 시나고그를 보고 유대인 지구를 돌아다니는 것으로 만족한다. 유대인을 상징하는 별이 그려진 대문과 유대인 성직자의 인형을 파는 기념품 가게가 이곳의 정체성을 알려준다. 유대인의 유물이 전시되었다는 클라우스 시나고그 앞의 관람객들은 노인이 많다. 이곳에 들르는 사람들은 유대인의 후손인지 독일 사람이 많은지, 건물보다 사람들이 묘하게 더 궁금해진다.  


천년의 세월이 만든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의 이면에는 슬픈 역사가 숨어 있었다. 왕자를 만날 공주가 잠든 동화 속에 화형 당한 마녀도 살고 있었다는 것을 잠깐 잊었다. 배경지식도 없고 흥미를 끄는 것도 아니지만 프라하에 왔으니 요제포브의 존재는 알고 가야 맞다.

요제포브를 돌아다니며 불편하던 마음은 아름답고 활기찬 구시가 광장에 돌아오니 편해진다. 어제 비 내린 후에 활짝 갠 하늘에 핀 흰 구름은 더욱 풍성하다. 마차며 자전거며 음악을 준비하는 거리의 악사들이며 행인들, 노천카페에서 음식을 기다리는 사람들까지 모두 생기가 가득하다.  

 햇빛에 쏟아지는 광장에서는 마차가 손님을 기다리고 커다란 비눗방울을 만드는 사람을 따라다니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시질 않는다. 느긋이 점심을 먹고도 한참 동안 광장의 풍경을 즐긴다.

각종 기념품을 파는 하벨 시장을 지나니 바츨라프 광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메트로 입구가 있는 현대적인 건물 끝에 보이는 국립박물관이 수채화 같은 풍경을 만든다. 하지만 지금은 바츨라프 광장이 아니라 나로드니(Narodni) 거리로 가는 중이다. 구시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들이 여행이 아닌 일상을 사는 곳이다. 택시가 서고 트램이 다니고 서점과 빵집이 있는 거리에 무표정한 사람들이 지나간다. 그 무표정 뒤의 무엇을 발견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고 있는 프라하가 아쉬워진다.

 

대형 할인매장 옆의 트램 정류장은 첫날 프라하성으로 가는 22번 트램을 탔던 곳이다. 이곳을 찾기 위해 헤매고 티켓을 사기 위해 헤매고 트램 정류장을 제대로 찾으려 헤맸던 그 낯선 아침이 나흘 만에 추억이 됐다. 빨간 트램이 사람들을 태우고 천천히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게 좋다.

바츨라프 광장에서 나로드니 거리를 따라 걸으면 블타바 강변으로 오게 된다. 강변을 따라 한 블록 정도를 걸으니 아름다운 건물과 대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물결 사이로 희한한 건물 하나가 돌출되어 있다. 이름하여 "춤추는 빌딩(Tancici dum)"이다. 왈츠를 추는 남녀의 모습을 모티브로 지었다는 1996년 건축물이다. 지극히 현대적이고 파격적인 건물임에도 옆 건물들과 은근히 잘 어울린다.   

 

이렇게 옛 건축물과 조화되는 새로운 시도는 신선하다. 천년의 세월 동안 프라하가 만들어 온 아름다움 역시 시대에 따른 온갖 건축 양식들이 어우러져 만들어졌다. 춤추는 빌딩도 몇 백 년쯤 후의 미래에서는 관광지의 일부가 되지 않을까? 가로등의 아름다운 곡선을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자동차가 씽씽 지나가는 다리를 건너 걷다가 공원이 있어 들어가 본다. 저 위쪽 카를 다리와 프라하성의 경치는 아니지만 어디에서 바라보아도 프라하는 멋지다. 월요일 오후의 공원에 아이들의 웃음소리만 울려 퍼진다. 벤치에 앉아 놀이터만 바라보고 있어도 저절로 미소가 피어난다. 저리도 즐거운 아이들은 아직까지는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기분일 것이다.


강변을 따라 내려왔기에 카를 다리 풍경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긴다. 강가에 서 있는 사람들을 뺀다면 멀리 보이는 건물과 카를 다리와 블타바 강의 풍경은 13세기나 다름없을 것이다.

카를 다리에 인접한 레기 다리를 건너다보니 첫날 프라하성에서 걷다가 모르는 사이에 왔던 그 마법의 캄파 섬에 또 와 있다. 길이 연결되어 그런 것이지만 기대하지 않다가 들어오게 되니 더 반갑다.  


수로가 흐르는 캄파 섬은 작은 베네치아 같다. 사공이 노 젓는 곤돌라는 아니지만 작은 배들이 수로를 움직여 간다. 수로의 난간에는 어디서 많이 본 자물쇠들이 잠겨 있다. 사랑의 자물쇠를 아무리 열심히 잠가 놓아도 이미 변한 마음을 붙잡을 수는 없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만이 자물쇠를 달았을 것이다. 사랑의 맹세가 지켜질지는 미지수지만 알록달록 엉켜있는 자물쇠들은 여행자의 눈길을 끄는 데는 성공이다.


호텔과 레스토랑이 늘어선 거리지만 캄파 섬의 거리는 어수선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그냥 예쁜 그대로 거기에서 조용히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림자는 길어지고 구름은 점점 많아져 하늘을 덮고 있지만 캄파 섬의 잔잔한 오후는 여유롭기만 하다.

캄파 섬에서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다시 카를 다리의 중간으로 오른다. 날마다 공연을 하는 할아버지 밴드 앞에는 단체 관광객들이 한바탕 요란스러운 춤판을 벌이고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처음 보는 젊은이들이 경쾌하게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다. 다리 난간에 기대 연주를 듣는다.  

저녁이 될수록 쌀쌀해지는 날씨에 몸을 덥히려고 카페에 들어가서 다리도 좀 쉬고 일정도 정리하고 카를 다리로 나온다. 온종일 몇 번을 카를 다리에 오게 된다. 불빛이 비치는 블타바 강도 어두워져 가는 카를 다리도 이젠 정말 마지막이다.  


모차르트의 음악 <돈 조반니>가 탄생했고 가장 많이 연주된다는 도시, 세계적인 작가 카프카의 고향, 영화 <아마데우스>와 <불멸의 사랑>, <프라하의 봄>의 배경, 아인슈타인이 재직하던 프라하 대학이 있는 곳,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 바로 프라하다. 필스너 우르겔이라는 라거 맥주와 세계적인 맥주 버드와이저의 고향, 로봇과 골렘과 달러의 어원이 된 나라, 드보르작과 야나체크와 스메타나의 음악이 흐르는 체코.


알면 알게 될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넘쳐흐르는 유서 깊은 도시 프라하에서 나흘은 너무도 짧다. 오래전 유럽여행을 하며 들르지 않았던 후회 때문에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에 억지로 끼워 넣다시피 방문한 프라하였지만 또다시 후회가 남는다. 다음에 프라하에 오게 된다면, 그 많은 이야기들을 포용할 수 있는 품위를 가진 나이에 오고 싶다. 지긋한 흰머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기품 있는 노인이 되어 여기 왔던 일을 추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호스텔에 맡긴 배낭을 찾아서 메트로를 타고 플로렌츠 버스터미널로 간다. 배낭을 눕혀놓고 전원 콘센트를 찾아 터미널 바닥에 철퍼덕 앉아 아이패드를 충전시킨다. 유럽의 어느 곳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짐을 끌고 들어와서는 몇 개 안 되는 의자를 차지하고 버스를 기다린다.


친숙해진 도시를 떠나 생소한 도시로 향하는 복잡 미묘한 심정은 아직 익숙해지지 않는다. 버스는 마지막 여정 부다페스트를 향해 출발한다. 수많은 밤차를 탔건만 이조차도 오늘이 마지막인 게 아쉽다.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던 긴 여행의 끝자락에서 프라하에 머물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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