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델리역,방향감각과 이성을 잃다

넋 나가게 하는 뉴델리의 혼잡속에서

by Girliver

“일어나세요! 5시 20분까지 버스에 타야 합니다!”
어젯밤 늦게 자서 몇 시간도 못 잤는데 벌써 모닝콜이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50분이다. 어젠 항공편이 확정 안됐는지 언제 떠난다는 말도 없더니 이 새벽 느닷없는 모닝콜에 기가 막힌다. 준비할 건 별로 없지만 호텔 조식도 못 먹고 이렇게 뛰쳐나가야 한다. 특별히 기분 나쁜 불친절이라기보다 중국 특유의 ‘친절하지 않음’이 느껴져서 허허로운 웃음마저 나온다. 이번 여행에서 중국은 안 가지만 중국 남방항공을 이용하고 있었구나 하는 뒤늦은 자각이 든다.


어젯밤 항공사에서 마련해준 호텔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델리 호스텔에 있어야 하는 밤에, 광저우 호텔에 있다니 여행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앞으로 누리지 못할 이 호사를 즐기고 싶어 진다. 이런 호텔, 그것도 트윈룸을 혼자 쓰면서 여행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여행의 첫날 예기치 않은 항공편 취소는 상상도 못한 호텔 뷔페와 숙박을 제공해 준 셈이다. 피곤한 하루였지만 그렇게 만족하고 호텔에서 마련한 저녁을 먹었었다.


5시 30분에 호텔에서 버스 출발, 8시 30분 비행기 탑승, 6시간이 지나 현지시각 1시 10분 뉴델리 공항에 도착했다. 벌써 하루가 다 지나간 듯한 기분인데 아직 점심시간이다. 원래 일정은 밤 10시, 늦은 시각 델리 도착이어서 그 시간에 시내에 가는 것이 부담스러웠었다. 그러나 이렇게 낮에 도착하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게다가 지난 2007년에 델리 공항에서 한국 들어올 때 한창 공사 중이던 공항은 이렇게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다. 일단 ATM을 찾아 환전을 하고 공항철도를 타고 뉴델리로 들어온다.

숙소를 찾아 여행자 거리 빠하르간지(PAHRGANJ)로 가기 위해 뉴델리역으로 간다. 지하철은 쾌적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지하철에 탈 때마다 검색대에 짐을 통과시키는 시스템은 여행자를 힘들게 한다. 앞뒤로 배낭을 메고 있는 처지로는 배낭을 내렸다가 다시 메는 일이 쉽지 않은 탓이다. 인파를 헤치고 검색대를 통과하며 무사히 뉴델리역에 도착했지만 그다음은 더 문제였다. 방향감각이란 게 통째로 사라져 버린 듯하다. 메트로에서 지상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 뉴델리역 앞 인파와 빼곡히 들어선 오토릭샤들이 갑자기 눈앞을 점령해 버린다. 도무지 방향을 알 수가 없다. 공항에서 본 단정한 인도는 잠깐이었고, 6년 전에 봤던 그 혼잡한 인도가 바로 데자뷔 된다.


이제 할 일은 간단히 외국인 전용 창구(International Tourist Bereau)를 찾는 것이다. 거기서 안내를 받아 자이살메르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하고 빠하르 간즈로 가서 숙소를 구하면 된다. 그런데 역에 들어가니 창구마다 기차표 사거나 예매하는 사람들만 바글바글하다. 방향감각을 이미 상실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이 층에 올라가도 아무것도 없고, 허둥대며 다시 내려온다. 그걸 지켜보던 인도인들이 역시나 그 까만 눈동자로 빤히 얼굴을 쳐다보며 말을 건다. 몇 명은 잘 뿌리쳤는데 적극적으로 다가와 외국인 전용창구는 오늘 토요일이라 지금 문닫았다면서 친절하게 주소를 적어주던 사람의 종이쪽지를 받아 들고 말았다. 그래도 이때까진 정신이 좀 있어서 주소만 받아 들고 거절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아까 그 사람이 또 나타난다. 자기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며 외국인 인포메이션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친절히 릭샤까지 잡아준다. 이때 정신 차렸으면 간단했는데, 이런 뒤죽박죽 한 상황에서 이성이란 걸 잃어버리는 시간은 찰나다. 이성이 사라진 뇌는 감성만이 자리 잡아 잠깐 동안 나에게 일어난 일련의 친절에 고마움만을 반응하는 중이다. 그렇게 생각이란 게 사라진 상태로 릭샤에 올라 인도에서의 첫 기분을 만끽하게 되었던 것이다.

릭샤에 올라 델리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약간 들뜬 마음으로 사진을 찍다 보니 지금 오토릭샤가 가는 방향은 아까 메트로를 타고 지나왔던 곳이다. 아무래도 낌새가 수상하다. 릭샤왈라 등을 두드리니 어딘가로 전화하던 그가 깜짝 놀라는 듯한 기색이다. 순간 앗차 싶었다. 뉴델리역에서 이런 식으로 이런 곳에 오게 되어 눈뜨고 사기당했다는 인터넷 까페의 수많은 글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드디어 빠져나간 이성이 돌아오는 순간이다. 잠시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고 너희들이 거짓말하고 있는 걸 아니 뉴델리역으로 가던지 경찰서로 가자고 했다. 안면을 확 바꾼 릭샤왈라가 알겠다며 데려다 준 곳은 허접한 간판의 사설 인포메이션 센터 앞, 두어 명의 인도 남자들이 희죽 거리며 사무실에서 나오고 릭샤왈라도 어깨만 으쓱해 보이고 운전대를 잡고 있다. 여기가 경찰서냐고 소리쳐도 얄밉게 웃기만 하니 더 화가 난다. 겉으로는 재미있는 듯 웃고 있는 그들도 긴장한 것 같기는 했다. 릭샤 비는 물론 주지 않았고 그들은 달라고도 하지 못했다. 내려서 다른 릭샤를 잡았다. 이번엔 돈이 문제다.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부른다. 그 가격 아니면 안 간다고 억지를 쓰길래 조금 가다가 다시 릭샤에서 내려버렸다. 여전히 그 릭샤왈라도 비웃음 같은 미소를 짓고 쳐다본다.


앞뒤로 맨 배낭은 너무나 짐스럽고 아직 숙소는커녕 인포메이션 센터도 못 찾고 릭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도 오히려 목적지도 아닌 곳에서 또다시 실랑이를 하고 있자니 진짜 열불이 난다. 정신을 차리고 현지인들이 흥정해주면 되겠지 싶어 마침 옆을 지나가는 선량해 보이는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릭샤비 얘기를 하는데, 눈치를 보니 그 지나가는 아저씨도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다. 어쩔 수 없이 거리를 잠시 걸어 어딘가 사람들이 많은 곳에 이르러 여기가 어딘지 물으니 코넛플레이스(Connaught Place)란다. 뉴델리역과 이곳은 지척이다. 그 동네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로 ‘열 받는다’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거다. 상대방보다 오히려 당하고 있던 내가 바보 같아서 화가 더 난다.

일단 기차표를 구입하러 뉴델리역이 아닌 올드델리 역으로 가기로 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자이살메르행 기차를 타야 하는 올드델리 역에 가서 차표를 구입하는 게 낫겠다 싶다. 미리 예매한 자이살메르행 기차표는 어제 비행기 연착으로 무용지물이 되어버려 또다시 기차표를 구해야 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검색대에 배낭을 풀렀다 멨다 하면서 메트로를 타고 사이클 릭샤를 갈아타고 올드델리 역으로 갔다. 이성이 돌아온 뇌는 냉정하게 지금 상황을 파악하고 그런 일들이 재발하지 않도록 정리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올드델리 역 도착, 자이살메르행 기차는 표가 없어 못 구하고 대신 조드푸르를 경유해서 자이살메르로 가기로 했다. 이미 해는 넘어가고 있다. 어떤 일이든 끝은 있고 델리 역에서 가짜 외국인 창구로 끌려들어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해지는 델리 시내를 즐기며 다시 뉴델리역으로 간다.

우여곡절 끝에 두 번째 온 뉴델리역, 이제 빠하르간즈로 가기 위해 육교를 건너야 한다. 육교에 오르려 하니 총 맨 경찰들이 가까운 쪽 계단은 짐 있는 사람들은 갈 수 없다며 저 멀리 있는 계단으로 돌아 가라고 한다. 산너머 산이라더니, 뭐하나 한 번에 되는 게 없다. 낑낑거리며 먼 쪽 계단을 넘어 육교 반대편으로 간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빠하르간즈로 가는 길을 찾고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더듬어 숙소를 찾는다. 그래도 다행인지 숙소 로비에선 와이파이도 된다. 정신없는 와중에서도 무사히 도착했음을 한국에 알리고 거리로 나간다.


잘 곳을 정하고 떠날 곳도 정했으니 이젠 먹을 곳을 찾아야 한다. 여행자의 기본이다. 탈리를 주문해서 먹고 거리 노점에서 라시도 마시며 현지인들과 이야기를 한다. 무섭도록 피곤했던 하루가 지나가는데도 배부르고 등 따뜻하니까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사람이 단순해져도 되는지 모르겠다. 12월 21일의 북인도, 핫샤워가 된다는 욕실에선 미지근하다 못해 찬기운 마저 느껴지는 물이 졸졸 나왔지만 오늘 겪은 일들에 비하면 견딜만하다.


한나절 만에 방향감각과 이성을 도로 찾은 여행자에게 이제는 피곤이 엄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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