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를 찾은 꽃처럼

블루시티 조드푸르에서의 한나절

by Girliver

델리에서 자이살메르(Jaisalmer)로 가는 기차가 없어 일단 조드푸르(Jodhpur)로 왔다. 또다시 밤기차로 자이살메르에 가야 하니 기차에서 연속 2박을 해야 한다. 흔들리는 기차에서의 2박이 걱정스럽긴 하지만 일단 이 순간을 즐기기로 한다.


오늘은 조드푸르를 보며 하루를 지낼 예정이다. 역시 조드푸르 역 클락룸에 배낭을 맡긴다. 인도 역에서는 출발 기차표가 있으면 클락룸에서 짐을 보관해준다. 돈을 내긴 하지만 여행자에겐 참 좋은 서비스다. 코인라커에 돈을 넣고 기계에 짐을 맡기는 시스템보다 이렇게 면대면으로 사람을 마주하는 방식이 훨씬 정스럽게 느껴진다.

이른 아침의 역 앞, 작은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벽돌을 쌓아놓은 벽은 미장도 제대도 되지 않아 꼭 창고 같다. 문 앞 노점에서 볶은 쌀과 양념들을 사가지고 들어와서 먹는다. 휘청거리는 테이블 달랑 세 개, 주문한 음식은 그래도 생각보다 맛있다. 여행지에서는 예상을 하지 않아야 하는 걸까? 늘 생각과는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맛없어도 먹어버리겠다고 다짐했던 오늘의 메뉴는 맛이 좋았다. 어차피 싼 음식엔 향신료도 비싸서 못 넣는다고 한다. 음식이든 문화든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다가가는 것이다.


오토릭샤를 잡아 사다르 바자르(Sadar Bazar)로 간다. 이곳은 시장이다. 너무 이른 시각이어서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이 많다. 시장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다 골목으로 들어가 본다. 이유는 하나, 딱히 할 일 없고 머무를 데 없는 여행자이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그들에겐 삶의 터전일 골목들을 둘러보는 것도 재미있다.

간신히 문을 연 가게에 들어가 15루피짜리 커피를 한 잔 마신다. 막 장사 준비를 시작하는 가게에는 젊은 아버지와 아들 셋이 분주하다. 바로 전, 말끔히 옷 입고 학교 가는 아이들과 인사하며 이 가게에 들어왔는데 이 아이들은 학교에 안 가는 눈치다. 부끄러운 듯 제대로 눈을 못 맞추는 아이들과 웃음을 주고받으며 커피를 마신다.


동네를 기웃거리니 또 사람들이 말을 건다. 단지 사다르바자르 가는 길을 물었을 뿐인데 좋은 물건을 파는 가게를 알려준다며 골목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저씨도 있다. 시간도 많은데 밑져야 본전이라고 따라간 가게는 옷과 천을 파는 곳이다. 주인은 실망한 것 같지만 구경만 하다가 나왔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른 시각 마수걸이라 기분 나빠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깨만 으쓱할 뿐이다. 소들이 풍경처럼 점령하고 있는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작고 예쁜 가게를 발견했다. 옷과 가방, 낙타 가죽으로 된 수첩, 기념품 같은 것들을 파는 곳이다. 주인도 깔끔한 젊은이이고 무엇보다 물건이 예뻐서 눈길을 끈다. 알라딘 바지를 한 벌 샀다. 인도에 왔으니 청바지는 벗어버리고 알록달록 편한 여행자용 바지를 입고 싶다.

오전이 되자 사디드 바자르에 장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노점에서 좋아하는 라시 한잔을 마시고 시장 구경에 나선다. 어디든 시장은 여행자의 기분을 좋게 한다. 여행자를 위한 가게에서 파는 비현실적인 물건들이 아니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파는 현지 시장이 훨씬 생동감이 넘친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궁금할 정도로 시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아마 그 ‘무슨 일’은 그저 ‘생활’ 일 것이다.


사막이 많고 위치가 인도 서부지역이라 전쟁도 많았던 곳이 바로 라자스탄이다. 조드푸르는 라자스탄이라는 주의 한 도시다. 마하라자라 불리는 영주, 유명한 세밀화, 용맹한 전사와 아름다운 여인들의 이야기가 전해 오는 사막의 땅이 이곳이다. 라자스탄의 사막이 바로 타르사막, 그 사막을 보러 가는 곳이 자이살메르(Jaisalmer)다. 사막을 만나기 위해 자이살메르로 가는 여정으로 지금 조드푸르에 와 있다.


조드푸르는 블루시티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도시다. “김종욱 찾기”라는 한국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이 첫사랑을 찾으러 떠나는 곳이 바로 여기 조드푸르다. 처음 인도 여행에서도 조드푸르 역에 왔었지만 정작 도시는 둘러보지 못하고 자이푸르로 떠났었다.


소와 집과 골동품 가게들을 구경하며 파랗게 칠해놓은 집들을 찾아 땀을 좀 흘리자면 메헤랑가르 성이 나타난다. 메헤랑가르 성(Meheranggar Fort)은 조드푸르의 상징이다. 산스크리트어로 태양의 성이라는 뜻이다. 외성이었던 사다르 바자르에서 보면 배경처럼 아득한 곳이지만 왕조 시절에는 평민들은 감히 꿈꿀 수 없는 왕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입구에는 악사들이 옷을 차려입고 라자스탄 전통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음악은 특유의 리듬으로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흥에 겨운 사람들은 연주를 듣고 옆에 가서 사진을 찍기도 한다. 6년 전 인도, 우다이푸르의 시티팰리스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두 번째 인도 여행이라 이렇게 겹치는 장면이 생기게 되는구나 싶다. 그래도 아주 오랜만에 라자스탄의 독특한 문화를 느껴보는 것은 묘하게 즐거운 기분이다. 나만 알고 있는 것을 남몰래 확인하는 즐거움이랄까? 메헤랑가르 성 내부는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라자스탄 문화로 가득하다. 선생님과 함께 온 인도 학생들도 많다. 느닷없이 카메라를 들이 밀어도 활짝 웃어주는 인도 사람들의 유쾌함이 참 좋다.


성의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천천히 걸어내려 와 다시 시장통으로 향한다. 사람 구경, 집 구경, 소 구경, 향신료 구경, 시장 좌판의 물건들 구경....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돌아다닌다. 어제 찬드니촉과 오늘 사다르바자르에서 본 사람을 합치면 내가 여태 살면서 만난 사람보다 훨씬 많을 것 같다. 기차역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기차표 예약사무소를 찾아 자이살메르에서 바라나시로 가는 표를 예매한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다. 네 번째 해가 진다. 늦은 밤 기차역의 어수선함도 나쁘지 않다. 사막에서의 하룻밤을 꿈꾸며 밤 기차를 탄다.

사람들 속에서 복닥거리니 이제 여행다운 여행을 하는 것 같다. 무채색 종이꽃 같았던 한국에서의 일상이 페이드 아웃된다. 해지는 조드푸르에서 생기를 찾은 꽃처럼 즐거워지기 시작한다. 떠나온 지 나흘째, 서서히 여행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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