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드푸르 역에서의 멘붕 타임 그리고 해제
자이살메르(Jaisalmer)에서 조드푸르(Jodpur)를 거쳐 바라나시로 이동할 계획이다. 워낙 먼 거리라 이동 시간이 길다. 연말이라 현지인들도 기차를 많이 이용하고 관광객도 늘어나서 기차표를 구하는 게 쉽지 않다. 그래도 자이살메르-조드푸르 기차와 조드푸르-바라나시 기차를 예매해 놓아 다행이다.
벌써 세 번째 밤기차 이동이고 편한 3A기차에 자리가 있어서 타고 조드푸르로 왔다. SL기차와는 달리 쾌적하고 따뜻하니 지난밤 사막에서 노숙의 피로가 싹 풀릴 정도로 푹 잤다.
조드푸르 역은 어쨌든 인연이 많다. 몇 년 전 4월에도 자이살메르로 가려다 너무 더워 포기하느라 이 역에서 하차해 밤을 보냈었고, 이틀 전에 왔었는데 바라나시로 가기 위해 또 왔으니 벌써 세 번째다. 이 역은 웨이팅 룸이 다른 역보다 깔끔하고 시설이 좋은 편이다. 이미 역에 대한 정보는 모르는 게 없으니 웨이팅 룸에 들어가 카메라 충전도 하고 씻으며 기차를 기다린다.
웨이팅룸에는 기차를 기다리는 할머니 세 분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도시락을 꺼내서 한참을 맛있게 드시더니 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음식을 나눠주신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을 절대 먹지 말 것!’이라는 인도여행의 주의사항이 생각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의 판단 능력은 있다. 그것은 할머니들의 친절이 담긴 정말 맛있는 홈메이드 인도음식이다. 할머니들 사진을 찍어서 보여드리면서 한참을 웃는다.
그러다 승차시간을 가늠하려고 무심코 기차표를 꺼낸 순간, 일대 혼란이 시작된다. 기차표에 인쇄된 승차시각은 12월 25일 오전 9시다. 시계는 오전 8시를 가리키고 있으니, 한 시간 후 기차를 타면 된다.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 곰곰 생각해보니, 오늘은 12월 26일이다! 저 기차표의 기차는 어제 오전에 이미 이 역을 지나갔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다. 날짜를 잘못 기입한 표를 가지고 있는 거다.
인도 기차를 예매할 때는 승객이 먼저 정해진 양식의 용지에 차편과 날짜, 개인정보 등을 적어서 창구로 가져가면 매표소에서 그 시간의 좌석 여부를 체크하고 표를 발매해 준다. 그렇다면 그것은 창구직원의 실수가 아니라 나의 실수였다. 델리에서 혼이 빠졌던 여파일까? 어쨌든 날짜를 헷갈려 이루어진 역사다. 멘붕이다.
서둘러 기차표를 다시 구입하면 해결될 것 같지만, 바라나시행 기차는 하루에 한 번 운행되는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연말연시라서 바라나시까지 가는 좌석은 이미 다 예매된 상태다. 조드푸르에 또다시 머물기는 싫어서 무조건 자이푸르(Jaipur)까지 가는 표를 끊는다. 기차 안에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바라나시까지는 못 간다. 자이푸르부터 바라나시까지의 좌석이 예매가 끝난 상태인 것이다. 돈을 더 내고라도 이 기차를 계속 타고 바라나시로 갈 수 있는지 검표하는 차장에게 묻지만, 그는 절대 안 된다는 단호한 대답만을 던지고 다음 칸으로 사라진다.
우울한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다가 건너편 좌석의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친다. 아주머니는 영어를 한 마디 못해도 외국인에게는 관심이 지대하다. 아그라에 거주한다고 하시길래 타지마할에 가봤다고 하니 엄지손가락을 보이며 좋아하신다. 거의 바디랭귀지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사진도 찍고 아주머니의 딸과 전화통화까지 하다 보니 마음이 편해진다.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겠지 싶다.
자이푸르는 전에 가 본 도시이지만 ‘또 가보지 뭐’하는 체념도 생긴다. 어찌 됐건 길은 있다. 아주머니와의 몸짓 언어도 시들해져 눈을 감고 있는데 이 호기심 충만한 아주머니 또 뭐가 궁금한지 흔들어 깨우신다. 눈을 떠 보니, 도시락이다.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갑자기 정신없이 기차를 타서 아무것도 없었는데 아주머니가 챙겨주시는 거다. 말도 안 통하는 인도 할머니들과 아주머니의 도시락으로 아침 점심을 때우고 있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자이푸르가 가까워 올 때부터는 무임승차라도 할까 정말 고민했지만, 그럴 용기까지는 못 내고 아주머니와 작별하고 기차에서 내려야 했다. 무작정 역을 벗어나리라 생각하며 우울한 마음으로 역안을 두리번거리는 순간 “Tourist Office”라는 안내표시가 눈에 띈다. 자이푸르는 대도시라서 역에 투어리스트 오피스가 있는 것이다. 얼른 사무실로 들어가 전후 사정을 이야기한다. 친절한 직원이 권해준 방법은 자이푸르(Jaipur)에서 버스로 칸푸르(Kanpur)에 도착, 거기서 바라나시(Varanasi) 행 버스로 갈아타는 것이다. 막연히 기차 이동 아니면 바라나시를 못가는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이런 방법이 있었다.
칸푸르라는 도시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곳이지만 어쨌든 그렇게 하기로 한다. 버스표를 어디서 사야 할지 또다시 난감해지는 순간, 친절한 직원이 전화로 누군가를 불러준다. 사람 좋아 보이는 경찰 아저씨의 안내로 무사히 티켓을 구입하고 버스터미널로 간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의지가 있으면 어디든 길은 있다. 한국을 떠나온 지 일주일밖에 안되는데 무슨 일이 이렇게 많고 하루는 또 얼마나 긴지. 인도에 온 이후엔 델리에서 하룻밤 잔 것을 제외하고는 밤기차에, 사막 야영에, 지금은 밤 버스까지 타게 됐다. 연속 5일이 노숙인 셈이다. 그래도 그 정신없는 시간들 사이에서 힘든 나를 웃게 해 준 건, 친절한 인도인들이었다.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이 하루는 끔찍한 기억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덕분에 멘붕 타임은 해제되고 편해진 마음으로 자이푸르를 떠난다.
인도에선 적지 않은 돈 천 루피짜리 조드푸르-바라나시 기차표를 휴지로 만들고 자이푸르-칸푸르-바라나시 구간을 버스로 이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