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바라나시

여행자로 보낸 한 해의 마지막 날

by Girliver

바라나시에서의 한 해의 마지막 하루가 시작된다. 아침 산책을 다녀온 후 중급 호텔로 분류된다는 곳으로 숙소부터 옮긴다. 가트와 갠지스강이 한눈에 보이는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곳이다. 여행지에서 맞이하는 연말연시와 생일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여 숙소를 변경하는 것이다.


이제 화장지나 물, 과자는 골목 구석의 작은 가게에서만 산다. 선량해 보이는 가게 주인아주머니와 인사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가이드북을 뒤져 찾아낸, 싸고 맛있다는 식당에서 특별한 메뉴들을 먹어보고는 며칠 단골이 된다. 주인과 눈인사를 하고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눈다. 머무름은 낯선 곳을 익숙하게 만든다. 갠지스의 가트를 걸을 때면 콧노래가 저절로 나올 만큼 가벼워진 마음이 느껴진다. 그렇게 적당할 만큼의 편안함으로 한 해의 마지막을 이국에서 맞는 것은 이채로운 경험이다. 여행을 계획할 때부터 이런 시간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생일이 1월 1일이라 새해와 생일을 바라나시에서 보낸다는 의미도 있다. 이렇게 타국에서 혼자 연말연시를 보냈던 경험은 없어서 더욱 설렌다.

옮긴 숙소는 계단을 내려오면 바로 갠지스의 가트로 연결되니 좋다. 항상 똑같은 것 같아도 어제 못 본 장면이 있고 오늘만 펼쳐지는 진풍경이 있는 가트의 아침이 좋아서 바라나시에서는 늦잠을 잘 수 없다. 길목에는 언제나 말을 건네는 어린 보트맨이 있다. 아침이나 저녁 보트는 사람들로 붐비지만 한낮에도 배로 갠지스를 둘러보는 사람들은 많지는 않다. 새벽 일출 보트를 마치고 느긋해진 다른 뱃사공들도 말을 건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배를 타라고 호객을 하는 것인지 그냥 이국에서 온 여행자와 이야기나 하려는 의도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대화는 점점 길어지게 마련이다.


수다쟁이 보트맨 들을 따돌리고 가던 길을 재촉한다. 서둘러야 할 이유 따위는 없지만 오늘은 강변의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제법 먼 남쪽까지 걸어볼 생각이다. 걸어갈수록 가트는 조금씩 모습이 달라진다. 가트들은 이름도 다르고 소유자도 따로 있다고 한다. 왕이나 귀족의 소유였던 가트들이 팔려 공공건물이나 개인 소유의 숙소로 개조되기도 한다. 아까 뱃사공도 말해줬지만 연말연시라 그런지 사람이 더욱 많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바라나시로 여행 온 힌두교도들이다.

한해의 마지막 날에도 풍경은 여전하다. 아이들은 가트를 운동장 삼아 크리켓을 하고, 배를 수선하거나 빨래하는 사람도 있다. 갠지스의 성수로 목욕하는 사람들은 늘 기본이다. 성수를 담아갈 커다란 물통들도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가트에서는 사람들이 머리를 깎고 있다. 여행자의 눈에는 강변 가트에서 머리를 깎는 일들도 화장터도 볼 때마다 그 낯섦에 멈칫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발동되는 장면이다. 더 걷다 보니 남쪽에는 작은 화장터 가트가 하나 더 있다. 북쪽 마니까르니까 가트처럼 크지는 않지만 이곳에서도 역시 바라나시에 도착한 시신들이 화장되고 있다. 한 해의 마지막 날도 예외 없이 연기는 여전하고 유족들이 지켜보는 장면도 그대로다. 여행자들이나 섣부르게 그 주머니를 노리는 사람들이 안보이니 북쪽 버닝가트 같은 번잡함이 없어 오히려 더 엄숙하다. 삶의 한 가운데를 걷다가 죽음을 마주하는 일 역시 한 해를 보내면서도 지속되야하는 사람의 일 일뿐이다. 하얀 연기와 재가 되어 곧 갠지스에서 구원을 받을 시신이 타는 모습을 이제는 담담히 지켜보게 된다.


조그만 사원 앞에서는 화로에 남은 온기 앞에서 바라나시의 행복한 개들이 취침 중이시다. 사람들은 개들을 깨우거나 내쫓지 않는다. 개나 소나 아무 데나 쓰러져 잠들 수 있는 곳, 어떻게 생각하면 바라나시는 글자 그대로 천국이다. 이런 장면들이 바라나시를 더 바라나시스럽게 한다.

한 인도 여자가 갠지스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있다. 옆자리가 비었냐고 물으니 흔쾌히 앉으라고 한다. 당연히 동행이 있을 것 같아 빈자리인지 물어봤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바라나시로 여행 온 델리 사람이다. 그녀는 펀자비나 사리 차림이 아니라 청바지에 풍성한 셔츠를 입고 있다. 인도에 와서 본 거의 모든 여자들은 사리나 펀자비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복장이 남다르게 보인다. 옷감의 종류나 디자인이 너무 다양해서 놀라울 정도로 전통의상을 고수하는 인도에서 전통의상을 입지 않은 여자는 영화에서나 봤을 뿐 실제로는 처음 만난다. 마흔다섯이라는 이 언니는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얼굴에, 고급 영어를 구사한다. 그녀도 나도 연말에 바라나시를 혼자 여행 중이라는 데서 공감대가 형성된다. 강변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급기야는 점심을 함께 먹기로 한다.


가이드북에서 점찍어 놓은 아시가트 근처의 피자리아에 가려고 했는데 마침 그녀가 데리고 간 식당이 그곳이다. 이런 우연도 인연인가 싶어 기분이 좋아진다. 갠지스강이 내려다 보이는 여행자를 위한 식당이라 외국인들이 바글거리고 연말 분위기도 흠뻑 난다. 그녀가 추천한 음식을 주문해서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보통의 인도인들이 대개 남이냐 북이냐를 묻는 것으로 한국에 대한 질문이 끝나는데 비해, 그녀의 한국에 관한 지식은 급이 다르다. 현재 인도와 우리나라의 정치 수장이 여성인 공통점은 물론이고 80년대 말 민주화운동, 학생들의 데모까지 언급한다. 알고 보니 그녀는 델리대학교 정치학 교수다. 인도에서 찾기 힘든 독신여성이기도 하다.

200루피가 넘는 점심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인도인과 식사를 해 본 것도 처음이다. 여태까지 만났던 인도인들은 가난하고 못 배웠지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녀는 중산층의 지식인이어서 더욱 새로운 만남으로 각인된다. 점심을 먹고 난 후, 함께 보트를 타고 남쪽의 갠지스강을 둘러본다. 인도인이 친구가 되니 보트맨과의 힘겨운 실랑이가 없어서 좋다. 한 겨울이지만 바라나시의 날씨는 봄 같아서 강바람이 시원하다.


뱃머리에서 사진을 찍던 몰리카가 나를 부른다. 강물을 두 손으로 떠올리더니 "이 물 좀 봐. 깨끗하지?"라고 말하며 그 깊은 눈으로 내 눈을 응시한다. 산 사람부터 죽은 사람까지 몸을 담그는 구원의 강 갠지스의 강물이 거짓말처럼 맑다. 그녀도 갠지스가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겠지만 그녀의 믿음이 두 손에 담긴 물처럼 맑아 보인다.


배에서 내리니 벌써 다섯 시가 넘는다. 한나절을 그녀와 함께 한 것이다. 뱃삯을 지불하려 하자 미리 지불했다며 걱정 말라한다. 우연히 만난 인도인이 태워준 보트, 그녀와 함께 돌아본 한낮의 갠지스는 아름답게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어제 료와의 선약이 없었다면 몰리카와 올해의 마지막 밤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만남은 이별과 멀지 않다. 사진을 찍고 메일 주소를 알려주고 두 팔을 벌려 서로를 안는다. 그녀는 "어차피 삶은 여행이야. "라는 속삭임으로 남은 내 발길에 행운을 빌어준다. 등을 토닥여주는 그녀의 손길이 따스하기만 하다. 길 위에서의 우연한 만남과 한나절의 유쾌한 시간, 그리고 작별인사가 메인 가트로 돌아오는 내내 미소를 머금게 한다.

부지런히 걸어 여섯 시에 시작되는 뿌자를 다시 한 번 본다. 인도인들 사이에 앉아 12월 31일, 이 꿈같은 현실을 즐긴다. 드디어 한 해의 마지막 태양이 뿌자와 함께 사라진다. 한국과 인도 시차는 3시간 30분, 부랴부랴 호텔방에 들어가 가족들과 카톡으로 새해 인사를 나눈다.


어제 일본 청년 료와 7시에 호텔 식당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다. 호텔 리셉션에서 체크인할 때 들은 얘기로는 그 시간에 송년파티가 시작된다고 한다. 어제의 료는 친절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지만, 막상 혼자 파티에 가려하니 뻘쭘하다. 이 호텔에 머무는 첫날이고 아는 사람이라고는 료 한 사람뿐인데, 만일 파티장에 그가 아직 오기 전이라면 혼자 쑥스러울 것 같다.


오늘은 진짜 외롭고 싶지는 않아서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며 료를 찾는다. 다행히 그는 케이라는 일본 여자와 함께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금세 어두워진 갠지스강이 내려다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이곳에는 료와 케이 말고도 대략 스무 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서양인 여행자 몇 명 묵기는 해도 다른 나라 사람보다 유독 단기간 인도에 오는 일본인들이 많이 머무는 호텔이다. 게다가 한국인은 나 하나뿐이다. 그럼에도 어색하던 기분은 인사를 나누면서 단번에 사라진다. 료는 대학 졸업반이고 중학교 교사라는 케이는 특이하게도 핀란드에서 교환학생을 했고 남미 여행도 이미 다녀온 베테랑 여행자다. 옆자리 가쯔상은 북해도에서 어선 사업을 하는 사업가인데 자기가 "Fish Teacher"라며 계속 농담을 한다. 료와 케이는 영어를 잘하지만 가쯔상은 영어를 잘 못해도 어떻게든 의사소통하는 유쾌한 사람이다. 다들 바라나시에 와서 처음 만난 사이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영어를 배우는 방법이 비슷하니 그 정서가 이해가 된다. 서툴러도 영어로 이야기해주는 다른 일본인들도 고맙다. 마침 일본어를 교양과목으로 배웠던 게 도움이 된다. 말은 잘 안 나와도 대화를 들으니 잊었던 일본어가 자꾸 되살아나는 거다. 뉘앙스를 파악해 의미를 이해하니 그들도 나도 더욱 즐거워진다.


식사는 인도식 뷔페와 인도 맥주 킹피셔 한 캔이 기본이다. 술을 금지하는 힌두교, 그들의 성지 바라나시에서 갠지스강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신다. 대화는 아무래도 여행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그래도 다른 날도 아니고 오늘 같은 밤은 같은 모국어를 쓰는 저 많은 일본인들이 부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마지막 밤의 춤과 음악은 서너 시간동안 계속 되었다. 이 무대(?)를 둘러싼 사람이 격정적으로 춤추며 놀기도...

실내에서는 계속 인도 음악이 연주되고 인형처럼 예쁜 무희가 춤을 춘다. 처음에는 앞에 앉아 구경만 하던 사람들이 취기가 오르자 모두들 함께 춤을 춘다. 일본인들이 그렇게 잘 노는지 처음 알았다. 다들 개별 여행자들인데 전부터 알던 사람들처럼 유쾌하게 즐긴다. 하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었어도 이국에서 지내는 한 해의 마지막 밤이라면 그랬을 것 같기도 하다.


이 파티에 초대해준 료와 그의 친구 케이는 고맙게도 계속 나를 챙겨준다. 생일이 1월 1일이라니까 농담으로 알아들어서 복대 속 여권까지 꺼내서 인증을 해준다. 눈이 휘둥그레진 일본 친구들이 눈짓을 하더니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준다. 유쾌한 가쯔 상의 지휘 아래 세 번이나 노래를 불러줘서 민망할 지경이다.

열 한시 반쯤 되자 옆에 앉았던 일본 여자들이 자기 방에서 컵라면을 들고 내려온다. 일본에서는 12월 31일에 국수를 먹으면서 한 해의 건강을 기원하는데 오늘은 국수가 없으니 라면이라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권하기에 나도 한 젓가락 먹어본다. 오늘 밤 나는 인도에서 일본식으로 한 해를 보내는 한국 사람이다.


모두들 바라나시에서 맞이하는 새해를 설렘 속에 기다린다. 드디어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다.

"10.. 9.. 8.. 7..6..5.4.3.2.1....Happy new year!!"

어둠 속의 갠지스 강을 바라보며 2014년 새해를 맞이한다. 다른 건물에서 폭죽이 터져 하늘을 수놓는다.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이 일순간 조용해진다. 잠시의 정적이 흐르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이야기를 하거나 갠지스를 내려다본다. 이 순간만큼은 정말 혼자가 된다. 강을 바라본다. 한 해가 필름처럼 지나간다. 왜 이 여행길에 서 있는지 생각한다. 여기 서 있는 이 순간이 내가 지금 마주한 현실이라는 것만이 참이다.

새벽이 되면서 사람들은 하나 둘 방으로 들어가고, 료는 다른 숙소에 묵는 케이를 데려다 주러 갔다. 자꾸만 갠지스강이 눈에 보인다. 낮과는 전혀 다른 적막에 싸인 가트를 바라본다. 숙소를 옮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 밤에 갠지스를 조망하며 이런 고요함을 위험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이점이다. 생각이 사라질 만큼 하염없이 강만 바라보고 있는데 희미하게 말소리가 들린다. "마담, 마담! 이리로 오세요!" 듣기 거북한 이 마담이라는 말은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에서는 일상적으로 여자를 부르는 존칭이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내가 야외식당에서 갠지스를 보고 있는 사이 호텔 직원들이 식당 실내를 정리한 후 간단한 식탁을 차리고 있다. 아까 송년파티 중에도 일했던 스텝들이 피로한 하루를 마치고 남은 술과 음식으로 미니 송년회를 하는 것이다. 영어뿐 아니라 일본어도 능숙한 직원, 호텔 차량 기사, 요리사, 요리사 보조 등 인도인 직원들이 열 명쯤 옹기종기 모여 있다. 콜라를 탄 럼주를 따라주고는 내가 잘 안 마시니까 자꾸 권하면서 자신들은 연거푸 잔을 비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바라나시가 고향인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나머지는 북인도의 펀잡이나 남인도의 고아 같은, 바라나시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일하러 온 사람들이다. 손님을 상대하는 직원들은 영어도 잘하지만 대부분의 스텝들은 영어도 서투르다. 호텔이 잘 돼서 좋지만 일이 너무 많다고 한다.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한다며 술잔을 기울이는 요리사의 선해 보이는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다. 잠자는 시간 이외에는 호텔 일을 한다며 손사래를 친다. 이 호텔 주인의 기름기 반들반들한 얼굴이 떠오른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이런 파티(?)가 허용되는가 보다. 능숙한 일본어로 많은 일본인 여행자들의 비위를 맞추던 직원은 이미 술에 취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 갠지스가 던지는 인생의 화두는 송년파티가 끝나고 이미 새해가 찾아온 식당 구석에서도 계속된다.


직원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중에 불청객이 찾아온다. 이 새벽에 한 여행자가 샴페인을 구하러 식당에 들어온 것이다. 뜻밖에 펼쳐진 술자리에 합석한 그는 러시아인이다. 내 국적을 묻더니 대뜸 자신이 북한에 가봤다며 말을 건다. 강남스타일 노래를 아느냐며 내 앞에서 춤을 춰 보이는 그 사람 때문에 모두 한참을 웃는다. 객실에서 그를 기다리던 부인까지 야밤의 식당으로 내려와서 새벽의 호텔 식당은 왁자지껄 해진다.


12월 31일, 갠지스 강변에서의 낮과 밤은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만남들로 채워졌다. "여행한다"는 말은 참 능동적인 뉘앙스지만 오늘은 반대였다. 영화로 치자면, 롱테이크로 갠지스 강변을 천천히 걸었을 뿐인데 여기저기에서 미리 캐스팅된 연기자들처럼 나타난 사람들이 스크린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주었다.


365일의 끝, 그 하루를 함께 나눈 사람들이 너무도 고마운 밤이다. 12월 31일의 갠지스라는 페이지에 크고 작은 추억으로 남게 될 사람들이다. 그렇게 살다가 어디선가 만나고 기억속으로 들어갔다가 잊혀지는 것이 삶일까? 하루가 일 년처럼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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