갠지스에서의 새해맞이

길 위의 날들은 계속된다

by Girliver

어젯밤 늦게 잠들긴 했지만 6시쯤 되니 눈이 번쩍 떠진다. 시끌벅적하던 호텔 야외 식당은 벌써 청소가 되어 있다. 늦게까지 송년회를 하던 직원들이 벌써 일어나 치워놓은 것이다. 아직 일어난 손님은 없는 듯 혼자 일출을 본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태양이 떠오른다. 달라졌다고 느끼는 건 사람의 마음일 뿐이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만큼 불가사의한 것도 없다.

갠지스 강가와 골목마다 역시 사람이 많다. 다른 지역에서 성지순례 온 인도인들과 여행 온 외국인들이 바글바글하다. 새해 첫날의 갠지스, 일출, 혹은 성스런 목욕은 그 어느 날보다 더욱 의미 있을 것이다. 가트를 한참 걷다가 어제 함께 했던 일본 친구들을 만난다. 반갑게 인사하려 다가가니 특이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일본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갠지스 강에 들어가 있다. 내가 알기로 그들은 함께 여행을 온 것은 아니었는데 같은 숙소에서 만난 인연으로 단체로 강물에 들어가고 있다. 아예 수영하는 사람도 있고 인도인들처럼 목욕도 한다. 아니면 발이라도 담근다. 그리고 꼭 인증샷을 찍는다. 이런 현상은 바라나시에 오는 거의 모든 일본인 여행자들에게 공통이다. 오늘은 특히 새해 첫날이니 그들로선 의미가 더 클 것이다.

화장한 시신의 재가 뿌려지는 강, 어린 아이나 임산부는 그냥 수장되기도 한다는데... 공식적으로는 인도 정부도 갠지스의 물이 더럽다는 것을 인정하고 정화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다. 한국인들은 절대 들어가지 않는 그 강물에 일본인들은 풍덩풍덩 빠진다. 왜 강에 들어가는가를 물으니 그건 일종의 모험이라고 대답한다. 바라나시의 일본인 여행자들에게 갠지스강으로의 입수는 용기의 척도가 되는 셈이다. 가트의 뱃사공은 몇 년 전 유명한 일본 여배우가 갠지스에 들어간 후부터 계속되는 일이라고 귀띔해 준다. 일본에서 몇 년 전에 이곳 바라나시를 배경으로 한 특집극 "갠지스에서 버터플라이"가 히트 쳤다고 한다. 드라마의 위력인지 배우의 카리스마인지 여하튼 새해의 갠지스에는 많은 인도인과 더불어 힌두교와 관계없는 일본인들도 몸을 담그고 있다.

벵갈리토라의 골목에서 가트로 나오는 길에는 항상 구두라는 뱃사공이 있다. 그는 호객을 하는 건지 친구를 찾는 건지 둘 다 원하는 건지 지나가는 여행자들에게 항상 말을 건다. 아마도 그가 아는 모든 것을 여기 가트에서 배웠겠지만, 그럭저럭 영어도 하고 일본어도 나름 하는 편이다. 구두라는 이름이 한국어로 신발을 의미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젊은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배웠을 한국어도 귀엽게 몇 마디 한다. 자기 배에 태웠던 여행자들 이야기도 하고, 중국인 여행자가 많아졌다며 그들이 한국인이나 일본인들보다 영어를 잘하다고 논평도 한다. 대화중에도 외국인 여행자가 지나가면 영어나 일본어로 보트 타라고 호객을 하다가는 남은 이야기를 이어 간다.


보트를 타도 좋지만 어차피 낮에는 시간이 많다면서 발걸음을 맞추어 걷기도 한다. 그는 유머러스하지는 않지만 착하고 성실한 사람인 것 같다. 여기 온 첫날 탔던 배의 사공은 이 사람과 같은 또래지만 말이 너무 많고 사람 눈치를 살피는 게 별로였다. 어제 몰리나처럼 이 청년도 느낌이 괜찮다. 자연스럽게 그와 친구가 된다. 인도 현실에서 보면 정치학 교수인 몰리나와 뱃사공인 구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조합이지만 둘 다 나의 친구가 되었다. 여행이 재미있는 백만 가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 가트의 수많은 뱃사공 중 한 명이었던 이 젊은이가 특별해진다. 이름을 불러 주면 꽃이 된다는 말이 맞다. 저녁에 그의 배를 타기로 약속하고 헤어진다.

새해 첫날의 인도는 어떨까 궁금해서 시내로 나간다. 가트는 저녁에 다시 오면 되니 릭샤를 잡아타고 대형 쇼핑몰에 영화를 보러 간다. 가트 근처 고돌리아에만 머무르다가 시내로 나가니 시골사람이 서울 구경하는 기분이다. 거대하고 현대적인 빌딩의 위엄(?) 앞에 멈칫하는 순간, 쇼핑몰에는 그냥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뉴델리의 메트로처럼, 인도 기차역 입구처럼 여기도 짐을 검색대에 놓고 무사히 통과되야만 입장이 가능하다. 어느 정도의 위험이 있어야 이런 보안 방법을 쓰게 될까 싶다. 무척 직접적이고 긴박한 위험일 것을 알면서도 귀찮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경찰이 지켜보는 곳에서 오랜 시간 줄 서는 건 기본이다. 한 번 밖으로 나가면 줄을 서서 검색대를 통과해야 하니 들어오는 시간이 걸린다. 오늘이 새해 첫날이라 그런지 가족이나 연인, 친구끼리 놀러 나온 현지인들로 넘쳐난다. 여기 와 있는 사람들은 갠지스 강변 가트에서 만나는 인도인들과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그들에 비하면 인도 옷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은 허름한 행색이다. 층마다 각종 브랜드 대리점이 늘어서 있고 최상층에 맥도널드와 영화관이 있는 풍경은 현대화된 도시의 그것이다. 한국과 다를 바 없는 흥청거림에 멀미가 난다. 그럭저럭 영화를 보고 나와서 여기 온 것을 후회하며 사이클 릭샤를 잡아타고 고돌리아로 돌아간다.

어느 여행자가 그리던 벽화가 어느새 완성됐다. 달빛 아래 반얀트리에서 노는 아이들을 그린 이 그림이 마음에 든다.
각국의 언어로 무료 공연을 알리는 낙서 뒤에서 진짜 무료 공연이 열린다. 새해 첫날이라서인가, 오늘은 조금 특별하다.

낮에 약속한 대로 구두의 배를 찾아간다. 한국말과 일본어가 능숙한 구두의 친구 게리가 데려온 일본 남자와 둘이 보트에 탄다. 뿌자를 보는 인도인들을 태운 배도 다른 날보다 더 붐빈다. 연말 연휴 열흘 동안 델리-아그라-바라나시만을 여행하는 일본 사람들이 진짜 많다. 같은 배를 탄 일본 남자는 오늘 바라나시에 도착한 사람이다. 빽빽한 일정으로 새해 첫날 바라나시에 숨 가쁘게 도착하자마자 갠지스강 위에 떠서 뿌자를 바라보는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처음 보는 뿌자에 넋을 잃은 그는 연신 카메라를 누른다. 뿌자의 신비함, 바라나시의 혼돈이 버무려진 미세한 흥분이 그에게서 느껴진다. 첫날 배에 타서 뿌자를 봤을 때 내 모습이 딱 저랬을 것이다.

강에 비친 가트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첫날에는 이 풍경을 보지 못했다. 보고 싶은 뿌자만 봤기 때문일 거다. 떠나 올 때보다는 시야가 트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일정 없이 느긋하게 즐기는 바라나시에서의 날들이 참 좋다. 여기에 오면 아무것도 안 하고 가트에 앉아 갠지스강만 바라보고 싶었다. 누굴 만난다는 변수는 계획할 수도 없었다. 혼자 즐기는 평온과 고요도 좋고,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배가 되는 즐거움도 좋다. 만일 바라나시에 세 번째 오게 된다면 그때는 어떤 것을 만날 수 있을까?

구두와 게리에게 저녁식사를 사주고 싶지만 여행자 식당에서의 식사가 맘에 안 드는지 그들은 한사코 거절한다. 대신에 뱃삯을 후하게 쳐 준다. 아마 그들은 현지인들이 가는 식당에서 배를 채울 것이다. 새해 첫날 저녁은 함께 배를 탔던 일본 남자와 먹는다. 이제 도착한 그는 나의 바라나시 이야기를 재미있어한다. 혼자 다니면 먹는 것도 일이 되는데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식사는 반갑기만 하다.


이래저래 늦게 호텔로 들어가는데 식당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내일 떠난다는 가쯔상과 료가 일본어 잘하는 호텔 직원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나도 내일 밤늦게 바라나시를 떠나기 때문에 이젠 모두 이별이다. 유리컵을 가득 채운 킹피셔 한 잔으로 아쉬움을 나눈다.


휴대폰을 꺼내 든 가쯔상이 오늘 갠지스에 입수한 그의 동영상을 보여준다. 북해도의 선박 사업가답게 높은 곳에서 갠지스로 다이빙하는 장면을 찍은 영상이다. 보면 볼수록 재미있다. 바라나시의 하늘로 날아오른 그가 갠지스에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빠지는 순간에는 고요하던 좌중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느라 정신이 없다. 무슨 일인가 하고 옆 테이블의 다른 여행자까지 합석한다.


여행자들의 저녁은 심각하지는 않다. 그 날 한 일, 가본 곳 등의 공통 관심사와 시시껄렁한 신변잡기들이 대화의 주제다. 어제 연말 파티를 함께 했던 이 귀여운 남자들은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큰 소리로 "Happy birthday to you"를 또 여러 번 불러 준다. 별 얘기 아닌데도 너무 웃어서 배가 아플 지경이다. 유쾌한 밤이다. 여느 여행지와 다르지 않은 하루가 지나간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새해 첫 태양을 바라나시에서 보고 싶다는 소망 하나를 이뤘고 이틀간이나 뜨거운 생일 축하를 받고 있다. 외로운 날이 될 거라는 예상은 완벽한 반전이 되었다. 그렇게 새로운 일 년이 시작되었고 길 위의 날들도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삶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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