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고 느긋하던 함피의 마지막 달빛

석양속의 만남, 헤마쿠다 힐

by Girliver

머무름은 편안함과 익숙함을 동반한다. 함피의 거리, 인도스런 옷들, 남인도 사람들, 저 꿈결 같은 풍경들 속에서 고요히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살고 싶지만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하기에 이 평화는 깨진다. 머물고 싶어 하는 것도, 떠나야 하는 마음도 모두 내 마음이다. 이 작은 혼란이 오히려 자유를 만끽하는 기분으로 전환되어 즐거워진다. 여행 초반의 어색하던 마음은 다 빠져나가고 오늘 여기에서의 내 모습은 그냥 여행자다.


일어나자마자 남인도에선 입지 않던 패딩과 바람막이를 빨래해서 널어놓는다. 바나나 잎이 깔린 아침식사를 하고 인터넷 카페에 가서 검색을 한다. 이틀 후엔 뭄바이에 도착해야 하기때문에 버스 티켓도 예매한다. 멈추어 있는 이 순간을 지속하고 싶지만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느긋하다. 밥을 먹거나 돌아다니거나 웹서핑을 하는 것조차 바쁠 게 없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을 피해, 여행자를 위한 제과점에서 맛있게 보이는 빵을 사서 숙소로 들어가서 먹는다. 집처럼 편안하고 깨끗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뒹구는 느낌도 이렇게 좋은데 여길 떠날 궁리나 하고 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만큼 함피가 좋고 여행은 더 좋다.

강가로 발걸음을 옮긴다. 빨래를 해서 강가 둔덕에 널어 말리는 풍경은 바라나시의 그것과 다름없다. 오늘은 강가에 사람이 많다. 수영하는 남자들, 바라보는 아이들, 머리 땋는 여자들... 강바람을 맞으며 저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본다. 하늘도 예쁘고 강도 아름답다.


거리의 풍경 중에서 이방인의 눈에는 원숭이가 단연 돋보인다. 강아지보다 원숭이가 더 많은 거리다. 마치 개들처럼 자연스럽게 사람 근처를 돌아다니고, 돌로 만든 신전에 이리저리 올라가 있는 동물들이 바로 원숭이들이다. 어쩌면 함피는 사람보다 원숭이가 살기 좋은 곳 일 것 같다는 상상을 하며 미소를 짓는다.

도착한 첫날, 대낮에 올라갔던 헤마쿠다 힐에 석양을 보러 오른다. 자연이 석공이 되어 커다란 바위산을 이리저리 쪼개 놓은 것처럼 보이는 함피 풍경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현실이다.


유명하다는 선셋 포인트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있다. 돌로 만든 유적을 바라보며 돌로 된 언덕을 올라 돌계단을 지나 바위산을 오른다. 딱히 할 일 없는 함피에서는 석양을 바라보는 일이 굉장한 의식이 된다. 오늘의 태양은 소임을 다하지만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딱히 할 일도 없는 조용한 산골마을, 굳이 일찍 일어나진 않으니 일출 볼 일은 없고 날마다 해지는 걸 보게 된다. 어제는 함피 바자르를 넘어가는 해를 보았는데 오늘은 저 멀리 바위산을 넘어가는 태양이다. 구름 낀 석양이 적막하다, 혹은 처량하기도 하다.


함피에서의 마지막 석양을 말없이 바라본다. 생각해 보면 석양은 어제도 그제도 아름다웠다. 오늘도 역시 다르지 않다. 밤이 온다는 것은 빛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사라지기 전의 태양 빛은 어떻게 저렇게 매번 빠짐없이 아름다울까? 여행을 떠나기 전과 후, 그렇게 천양지차로 느껴지는 하루들도 내 인생의 일부로 늘 아름다웠을 텐데....


선셋 포인트에 모인 다른 사람들도 조용히 자기만의 상념에 잠겨 지는 해를 응시한다. 사람의 마음이란 다 그렇게 비슷한 것이다. 이런 풍경 앞에서 말이 무슨 소용일 것이며 카메라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두워지기 전에 일어서려는데 저 쪽에서 어떤 동양인 남자가 걸어온다. 아웃도어를 입고 복대를 한 전형적인 한국 아저씨 스타일이다. 인사를 해보니 역시 오늘 도착한 한국인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헤마쿠다 힐을 내려와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다.


한식 메뉴가 있는 옥상 식당을 찾아간다. 그래 봤자 계란말이와 흉내만 낸 김치찌개지만 이국에서는 맛있는 한 끼다. 김 선생님은 가방에서 소주 한 팩을 꺼내 서빙하던 식당 주인을 부른다. 한국인을 많이 만나서 이미 소주 맛을 알고 있는 식당 주인의 얼굴이 싱글벙글하다.


평교사로 정년퇴직하신 김 선생님은 패키지 여행으로 가족과 함께 인도에 오셨다고 한다. 비싼 여행이어서 좋은 호텔에서 지내고, 차를 대절해서 한국어 잘하는 인도인 박사과정 유학생에게 가이드받으며 다니셨다. 그런데 김 선생님은 그런 여행에 불편함을 느끼고 가족을 먼저 보내고 혼자 남으셨다고 하신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그의 많은 경험과 인생에서 터득한 지혜(?)를 일방적으로 주입하려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겉으로는 경청하는 척하면서 정작 마음의 문은 닫게 된다. 그런데 김 선생님은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라면 예순이 넘는 정년퇴직한 남자분과 우연한 인연으로 한 테이블에서 식사하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인데, 오늘 함피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낯선 나라에 배낭을 지고 홀로 발 디딘 우리들은 나이, 성별을 초월해서 여행자라는 동질감을 공유한 개인들일뿐이다.


내일 밤 함피를 떠나는 우리는 내일도 강과 언덕, 바자르의 풍경이나 실컷 보다가 떠나려고 했는데 김 선생님이 사원 투어를 함께 하자고 하신다. 함피에 있는 수많은 사원 방문은 생략하고 비루팍샤 사원만 살짝 들여다 보고 빈둥거리려던 내일 일정이 빠듯해지는 게 싫지 않다. 해지는 언덕에서 단지 김 선생님을 만났을 뿐인데, 내일의 일정이 180도 달라지고 있다.


테이블의 초는 있으나 마나, 별로 밝지도 않은 옥상 식당에는 유일한 손님인 우리의 목소리만 가득하다. 마지막 석양 속의 첫 만남, 그게 바로 여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든다. 함피에서의 마지막 달빛이 은은하게 머리 위를 비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