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고 기묘한 풍경 속에서의 하루
함피에는 퉁가바드라 강(Tungabhadra River)이 흐른다. 수량이 풍부한 강과 먼 산의 바위 덩어리들, 야자수들이 처음 만나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고 있다. 대체 저 바윗덩어리들을 어떻게 해서 쌓여있는 것일까? 어디서 굴러 왔을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커다란 바위들이 강에도 널려있다.
여자들은 아침부터 여기 모여서 이야기하며 빨래를 한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시골일수록 여행자와 원주민의 대화는 더 유쾌하다. 웃음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배를 타야 강남에서 강북 마을로 갈 수 있다. 10루피(170원)를 내고 표를 받아 쥐고 사람들이 모이길 기다린다. 작은 배에 탈 사람들이 모여야 비로소 출발한다.
강북(?)으로 오니 멀리 비루팍샤 사원이 보인다. "우리 집"이라고 내가 부르는 게스트하우스와 함피 바자르도 저편에 있다. 논 사이에 야자수가 있는 게 여기가 남인도임을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어디에 가나 함피는 신기할 만큼 낯선 풍경을 보여준다.
퉁가바드라 강을 내려다보며 점심식사를 한다. 사실 여기 강북엔 점심 먹으러 왔다. 여행자들이 많이 오는 이 레스토랑은 전망이 참 좋다. 강을 내려다 보이고 멀리 함피 바자르와 사원까지 보인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점심을 먹는다. 파리떼가 윙윙 거리며 달라붙는 것만 빼면 시원하고 좋다. 인도 맥주 킹피셔를 오랜만에 마신다. 낙타 사파리와 바라나시에서의 연말 파티 이후 남인도에서는 처음 마시는 술이다.
맥주를 구하기 쉬운 만큼 이곳은 여행자들도 많다.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니는 여행자들이 많이 눈에 띈다. 논 옆을 따라 게스트하우스를 겸한 레스토랑, 인터넷 카페, 오토바이나 자전거 대여점 등 여행자를 위한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다. 더워서 오토바이를 타지 않고 걸어서 돌아다니는 게 쉽질 않다. 이곳은 해먹과 작은 방을 빌리는 값이 싸서 장기 체류자가 많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여기보다 강남, 우리 집 근처가 좋다. 내가 묵는 함피 바자르 쪽은 현지인의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인데 비해 이곳은 여행자만 바글거린다. 다음에 함피에 온다면 다른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강남으로 돌아오려고 배표를 산다. 그늘 밑 테이블에 한가하게 앉은 사람들이 보트 티켓도 팔고 코코넛도 판다. 대여섯 명이 저렇게 한가히 앉아서 하루에 얼마나 벌 수 있을까? 대도시식 복잡한 계산기로는 답이 안 나온다. 함피에 왔으니 함피식으로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참에 코코넛이나 하나 사 먹기로 한다. 쌓여있는 코코넛 중에서 하나를 골라 손 위에 올려놓고는 커다란 낫을 휘둘러 쪼개서 빨대를 꽂아준다. 더운 날씨 때문에 미지근하긴 해도 싱싱한 코코넛은 맛이 좋다.
손님들을 기다리던 보트가 출발한다. 한나절 강북(?)으로의 외유는 그렇게 끝이난다. 이제는 함피 바자르로 돌아와 비루팍샤 사원 앞을 걸어 마탕가 힐(Matanga Hill)로 간다. 거리에 널린 게 신전인 묘한 풍경에 웃음이 난다. 아직 못 가본 왕궁이나 신전들도 무지하게 많다는 데, 옛날 함피는 대체 어떤 곳이었을까?
언덕에 올라 바라보아도 바윗덩어리 산들과 돌을 깎아 만든 휑한 신전이 함피를 지키고 있다. 정교하고 놀랍기보다는 허물어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사람의 건축물과, 어떤 재해에도 꿈쩍 않을 것 같은 자연이 만든 바윗돌의 풍경... 둘 중 어느 하나도 익숙하지 않은 여행자들이 이 풍경을 바라본다.
바위에 걸터앉아 이름도 모르는 사원 터를 내려다본다. 고요하다. 새소리만이 귀를 간질인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신과 새들이 사는 세상으로 오는 게 너무 쉽고 간단하다. 눈길을 멀리 두면 둘수록 바위산들은 첩첩이 걸쳐있다. 유명한 여행자 누군가는 함피를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풍경"이라고 했다 하고, 어떤 사람은 "우주에서나 볼 풍경"이라더니, 이 풍경은 정말 기묘하다.
신들의 영역에 와 있는 것 마냥 감탄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 인도 여자들이 무엇인가 머리에 이고 지나간다. 이 돌덩이 고개 너머 어딘가에 사람이 사는가 보다. 고개를 들어 자세히 보니 실제로 이 돌산 꼭대기에도 집이 있다. 온통 바위로 가득 쌓인 멀고 가까운 산들이 에워싼 함피는, 돌로 만들 수 있는 온갖 신전을 지은 사람들의 후손들이 그 위에서 살고 있는 곳이다.
사실, 함피는 어느 대단한 왕조의 수도였다고 한다. 물이 풍부하고 숲과 논이 있는 이 곳을 천혜의 철옹성 바위 옹벽이 지켜주었을 테니 이해가 간다. 그러다 이슬람의 이름으로 세 나라가 협공을 해서 멸망하게 되고 함피의 영광은 모두 약탈되어 폐허가 된 것이다. 그 영광과 멸망의 산물로 돌로 지어진 건축물만이 남아서 바위산과 함께 함피 풍경의 일부가 된 것이다.
해가 저물고 있다. 이렇게 산중에서 바라보는 함피의 일몰은 늘 조심해야 한다고 들어서 저 아래 마을이 보이는 곳에서 석양을 보려고 한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나면 불빛이 없는 이곳은 암흑이 될 것이다. 함피 바자르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서는 사람을 더 몇 명 만난다. 저 멀리 함피의 랜드마크 비루팍샤 사원이 모습을 드러내고서야 안심이 돼서 비로소 계단에 자리를 잡고 지는 해를 바라본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정 같은 게 없는 자유로운 여행자에게 일몰을 보는 일은 중요한 일과다. 단 하나뿐인 태양이 오늘 내 삶의 영역 뒤로 넘어가는 일이 마치 의식처럼 경건하다. 동행이 말없이 해를 바라보는 옆모습도 아름답다. 계단에 앉아 직접 만든 석공예품을 팔던 아저씨가 다가와 부탁도 안 했는데 우리 둘의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덕분에 석양을 배경으로 한 사진 한 장이 함피의 추억으로 남는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천천히 걸어 함피 바자르로 돌아온다. 작은 산골 마을이지만 여행자는 참 많다. 이번 남인도 여행에서 가장 많은 여행자를 만난 곳이 함피다. 문명의 이기에 지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함피는 편안함을 줄 것이다. 누구든 이곳에서는 세상을 뒤로 하고 오랫동안 머물고 싶을 것이다. 북인도 자이살메르에서 만났던 여행자를 우연히 다시 만나 반가워하다가 서로의 남은 여행길에 축복을 빌어주고 헤어진다.
자연의 빛이 사라지고 인공의 빛이 켜지기 시작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 함피 바자르의 불빛들은 작고 보잘것없어서 더 소중하다. 주위가 온통 어두워지고 있는 바위산 골짜기 작은 마을의 아늑한 불빛이 마음을 어루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