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피 바자르, 길을 잃어도 괜찮아

넉넉한 마음과 다정한 눈빛들, 느긋한 함피

by Girliver

늦잠을 자고 싶지만 열어놓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 때문에 눈이 떠진다. 신문배달부의 외침, 옆집 뒷집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아침 식탁 치우는 달그락대는 그릇 소리, 닭 우는 소리...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창 밖에서 들려오는 잔잔한 삶의 소리들을 듣는다.


여행 떠나온지 한 달쯤 되어가다 보니 저런 일상의 소소한 소리를 듣는다는 게 따스하게 느껴진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따뜻한 된장찌개, 김치가 놓인 밥상이 저절로 떠올려진다. 식욕을 돋우는 장면이라기보다 그저 그리운 풍경이다.

펀자비를 입고 숙소를 나온다. 깨끗한 숙소 문 앞에는 부지런한 아주머니가 예쁜 그림을 그려 놓으셨다. 이 그림을 꼴람(Kolam)이라고 한다. 남인도에 와서 보게 된 꼴람은 신들이 땅으로 내려올 때 발을 딛는 받침대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매일 아침 집 앞에 쌀이나 돌가루, 꽃잎으로 기하학적 문양을 그려놓아 신의 축복을 가정으로 부르는 것이다. 무늬도 기하학적 이어서 어떤 것은 예술의 경지이기도 하다. 어느 집 앞의 화려한 꼴람은 신도 한 번은 발 디뎌 보고 싶을 것 같다. 매일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그리기에 꼴람을 그리는 인도 여인들의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은 자명한 이치다.


말이 바자르지, 작은 골목마다 여행자를 위한 레스토랑이나 게스트 하우스, 그리고 손바닥만 한 구멍가게, 액세서리 파는 노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맘에 드는 식당에 들어가 토스트와 커피로 아침을 먹는다. 식빵 두 쪽에 잼을 묻힌 토스트가 바나나 잎 위에 놓여 서빙된다. 남인도에서의 식사는 이 바나나 잎 때문에 더 맛있게 느껴진다. 푸른 바나나 잎 위에 놓인 토스트가 상상도 못할 맛이라고 말한다면 한국에선 허풍이 될 테지만 현지에서 느끼는 여행자의 감각은 실제로 그렇다. 이 오묘함은 미각이라기보다는 여행이 제공하는 공감각적 심상이기 때문이다.

함피의 상징은 비루팍샤 사원(Virupaksha Temple)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건축물이 비루팍샤 사원이도 하다. 이곳이 바로 함피의 랜드마크다. 사원에 들서서면 코끼리의 축복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줄 서 있다. 단돈 2루피를 내면 사원에서 사육하는 이 코끼리가 코로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이것이 코끼리가 사람에게 주는 자본주의적(?)인 축복이다.

코끼리를 지나 신전 복도 끝에 걸터앉았다. 신전이라고 아무것도 못 만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서 좋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그늘에 앉아 쉬는데 조심스레 아이들이 다가온다. 귀여운 오누이가 다가와 말을 걸기도 하고 엽서 파는 소년이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부르며 엽서를 내밀기도 한다. 그렇게 있노라면 지나가던 인도인들이 옆자리에 앉아 사진을 찍으며 함박웃음을 짓고 어떤 사람은 피리와 비슷한 악기를 들고 가다가 불어보라고 건네주기도 한다. 동양인이 이 펀자비를 입고 신전에 앉아 피리를 불고 있는 모습이 흥미로운지 진지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미소를 짓는다.

이 말도 안 되는 남인도에서의 인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마말라뿌람, 깐야꾸마리 그리고 함피에서의 인도인들의 환대는 동양인들을 자주 접한다면 없을 일 같다. 그리고 순박하고 호기심 많은 인도인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인 것도 확실하다.


이러다가는 사진만 찍어주다가 사원 관람도 못할 듯싶어 자리에서 일어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성한 사원을 보는데 집중하고 있다. 까만 맨발을 아무렇지도 않게 딛고 다니다가 어느 성소 앞에서 초를 켜고 지성을 드리는 인도인들의 신에 대한 경외를 이방인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마음이 순수하고 정성 가득하다는 것은 알 것 같다.

비루팍샤 사원을 나와 헤마쿠다 힐(Hemakuda Hill)에 오른다. 비루팍샤 사원이 보이고 그 뒤쪽이 함피 바자르다. 멀리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산이다.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화강암들이 싸여 이루어진 바위산, 무슨 왕조의 수도이기도 했다는 이곳에 남겨진 폐허의 신전들, 그 아래 옹기종기 사는 사람들. 그 풍경만으로도 이곳이 왜 많은 여행자를 모으는 곳인지 알 것 같다. 바위와 돌덩어리들의 산 아래 야자수들이 그림처럼 자라고 그 야자수 사이를 원숭이들이 헤집고 다닌다.

뜨거운 한낮 헤마쿠다 힐에서는 신기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허물어져 가는 신전 아래 한 가족이 놀러와 있다. 친척이라는 아이들은 사진 찍어 달라고 포즈를 잡고 캠핑을 하는 듯 점심을 만들던 어른들도 웃으며 인사를 한다. 방치된 신전 아래 그늘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고 돌을 모아 솥을 걸어 뭔가 요리를 한다. 캠핑(?)하는 가족들을 지나 좀 더 높이 올라간다. 또 다른 건물에 사람들이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함피의 경치를 즐기며 앉아 있다. 어디서 몰려든 건지 한 떼의 아이들이 달려와서 또 사진을 찍는다. 작은 핸드폰을 들고 함께 사진 찍자는 사람들이 또 줄을 선다. 웃어주는 순수한 눈빛의 아이들이 귀엽다.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 오후는 바람 잘 부는 티베트 음식점에서 보내고 숙소로 돌아와 여행에서 처음으로 낮잠을 즐긴다. 몸도 마음도 편하고 숙소는 집처럼 쾌적하다. 빨리빨리 보고 밤차 타러 떠나는 바쁜 일정에서 벗어나니 몸도 마음도 여유가 생긴다. 많은 걸 보기 위해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이런 느긋함이 참 좋기는 하다.

발길 가는 대로 걷다가 비루팍샤 사원이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먹는다. 식당 주인의 둘째 딸이 헤나를 하겠냐고 각종 헤나 디자인이 그려진 다 닳은 종이들을 펼쳐놓는다. 별로 할 일도 없던 우리는 식사 후 각자 손과 어깨에 헤나를 한다.


식당 옆 가죽 가게에서 팔찌 하나를 사고 물과 과자도 사서 말 그대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숙소로 돌아오려는데 자꾸 생각과는 다른 길이 나온다. 손바닥만 한 산골 함피 바자르지만 너무 얕본 것 같다. 아침에 숙소 주인아주머니가 왜 약도가 그려진 명함을 줬는지 알 것 같다. 지나가는 아저씨에게 명함을 보여주자 그 자리에서 숙소로 전화를 걸어 위치를 찾아 데려다준다. 골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아주머니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우리처럼 헤매는 여행자의 숙소를 찾아주는 것은 여기 함피에서는 주민 사이의 약속이라고 한다.


밤이 되면 이 바자르 말고는 멀리 돌덩이 산들도 야자수 숲도 신전에도 불빛이 사라진다. 특이하게 한 일도 별로 없고 많은 유적을 본 것도 아닌데 마음이 충만해지고 시야가 시원 해지는 곳이 함피다. 어제처럼 달이 뜨고 별이 반짝이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