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스, 마음이 끌리는 도시

[볼리비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수도

by Girliver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바다가 없는 나라, 입국 시 유일하게 비자발급이 필요한 나라, 남미에서 물가가 가장 싼 나라,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이라는 우유니 사막이 있는 나라, 그리고 쿠바 혁명을 이뤄낸 체 게바라가 다시 민중혁명하다가 체포되어 사망한 나라... 바로 볼리비아(Bolivia)다. 그리고 해발 3,200미터에서 4,100미터 사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 이 나라의 수도, 라파스(Lapaz)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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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나와 길을 찾으려고 아이패드 미니를 꺼내 위치를 검색하려는 찰나, 무심히 지나가던 아주머니 서너 명이 갑자기 나에게 달려든다. 느닷없는 아주머니들의 손짓에 오히려 당황하게 된다. 그걸 들고 다니면 누군가가 휙 낚아채서 도망가 버린다는 바디랭귀지를 하는 것이다. 예기치 못한 소란에 멍하고 있는데 마침 옆을 지나던 아저씨가 영어로 설명을 해준다.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나는 아이패드를 가방 깊숙이 집어넣는다. 여태 별 일이 없어 느긋해지려던 마음을 다잡게 된다. 그렇게 경계심이 생기면서도 이런 라파스 사람들의 친절이 한없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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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만 움켜쥐고 라파스를 돌아보기로 한다. 소매치기는 많다지만 선한 사람들의 친절에 기분이 좋다. 게다가 라파스의 거리는 돌아볼수록 볼 게 많다. 어디든 비슷하지만 높은 지대는 가난한 사람들의 거주지이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비싼 땅이다. 숙소에서 시내로 가는 길은 어디나 내리막길이다. 이 높은 도시 라파스의 더 높은 지역은 가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다. 좁은 인도에는 인디오 전통 복장을 한 할머니들이 좌판을 벌이고 바나나, 과일, 빵, 국수라도 여하튼 뭐라도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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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시장에서는 백발의 할머니들이 무언가를 팔고 있다. 이것들은 원주민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적이나 약으로 쓰이는 물건들이다. 동물 박제나 미라 같은 것들이 주렁주렁 달린 가게는 함부로 사진을 찍을 수 없을 만큼 신령한(?) 눈빛의 할머니들이 쳐다보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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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구경을 하며 천천히 내려가다 보니 산 프란시스꼬 광장에 이른다. 산 프란시스꼬 성당에 들어가 본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사람은 많지 않다. 성당이 주는 경건함과 평화로움이 이끄는 대로 자리에 앉는다. 종교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 역사와 문화의 저변에 종교가 크게 자리하고 있음을 여행을 하면서 깨닫게 된다. 이곳 성당은 느낌이 특이하다. 제단은 온통 황금빛이고, 보통 성화가 그려져 있는 자리에 특이하게도 성화의 인물들이 모두 마네킹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보일 듯 말 듯 은유하는 것보다 구체화해 보여주는 것이 남미 교회의 특징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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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고 금방 개는 것을 반복하는 변덕스러운 고지대의 날씨는 라파스 거리를 아름다운 그림처럼 만들어 놓는다. 우산 없이 다닐 수 없도록 비가 쏟아져서 거리 노점에서 우산을 샀는데 금방 날씨가 개어 버린다. 날씨 때문에 우산이라는 짐 하나가 추가된다.


국립박물관을 어렵게 찾아다니다 오늘이 휴관일이라 민속박물관에 다녀온다. 멀지 않은 곳에 한국 슈퍼가 있다고 해서 찾아가 본다. 오랜만에 한국 물건들을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컵라면 두 개를 사가지고 나오면서 주인아주머니께 근처에 괜찮은 식당을 추천해달라고 한다. 주인아주머니가 웃으며, 근처의 프라자 호텔 뷔페에 가라고 하신다. 호텔? 뷔페? 왜? 잠깐 머릿속이 복잡하다.


볼리비아가 상대적으로 물가가 너무 싼 나라이니까 남미 여행을 한다면 여기서 한 번쯤 호텔 뷔페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선택이라는 의미다. 앞으로 여행할 물가 높은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에선 꿈도 못 꿀 일이니까 말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오후, 프라자 호텔을 찾아가 멋진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음식을 먹는다. 동행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나 혼자였다면 가지는 않았을 테지만 여행이 주는 또 다른 경험이다. 레스토랑 안의 여유 넘쳐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꼭대기 숙소 근처의 좌판 할머니들을 떠올리게 된다. 세상 어디든 있는 게 빈부격차인데 여행지에서 유독 그런 생각이 더한 이유는 스스로 자신을 "가난한 여행자"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도 맛있는 음식들을 가져다 접시를 비우게 된다. 동행과 이야기를 나누며 앉아있는데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다. 어떤 남자가 식사를 하고는 돈을 안 내고 뒷문으로 도망을 간 모양이다. 결국 잡지는 못하고 웨이터끼리 눈짓과 행동만 부산스럽다. 가난한 나라의 고급 레스토랑 체험은 이 정도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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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스 현대미술관에 간다. 확실히 남미만의, 혹은 볼리비아만의 정열적인 느낌의 현대회화들이 많다.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회화 전공이라는 동행 때문에 들어가기로 했는데 덕분에 볼리비아의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낮은 지대의 다운타운에서의 볼일을 마치고 높은 지대의 숙소를 향해 걸어 올라간다. 넓게 퍼지는 주름치마에 커다란 보자기 같은 것을 둘러 아기를 업고 다니거나 물건을 넣고 모자까지 쓴 볼리비아 전통복장의 여자들이 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다. 인도에서도 그랬지만 서양식 옷보다 이렇게 전통의상을 입은 모습들이 더 예뻐 보인다.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세상이 획일화되는 모습은 보기 싫다. 반면 이런 개성 있는 옷차림들은 아름답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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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 걸쳐있는 가게마다 들어가 작은 기념품들을 기웃거린다. 비싸지 않은 소소한 기념품들을 흥정하는 재미가 있다. "우노, 도스, 뜨레스, 꽈뜨로, 신꼬..." 이젠 스페인어 숫자는 척척이다. 언어를 필요에 의해 생존 언어로 배우니까 한 번 배우면 잘 잊어버리지는 않게 된다. 그래도 마음속에 항상 스페인어 공부 좀 하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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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한 호텔이나 정부청사보다는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게 더 편하고 좋다. 마음대로 기웃거리고 마음대로 상상하다가 길을 잃기도 하고 상상이 틀린 걸 체험하기도 하는 길이 좋다.


남인도의 태양에 상한 머리카락이 많아 자를까 싶었는데 마침 여기 라파스의 언덕에서 미용실을 발견한다. 마침 동행도 머리를 다듬고 싶다 하니 얼른 들어간다. 작은 미용실에는 한류의 영향인지 우리나라 아이돌의 사진이 붙어있다. 그 머리형으로 커트하러 오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카탈로그를 보고 머리형을 정하고 의자에 앉는다. 주머니에서 빗을 꺼내 머리를 한 번 빗고, 다시 빗을 주머니에 넣고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가위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빗을 다시 꺼내는 일을 느리게 반복하는 미용사의 손놀림이 답답하다. 직모를 잘 다루지 못해서인지 원래 기술이 그런 건지 가늠도 안 된다. 머리카락을 일자로 싹둑 잘라버려 맘에 들지는 않지만 재미있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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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뷔페에서 과식한 건지 배가 더부룩한 게 가스가 꽉 차고 머리는 지끈지끈 아파온다. 한참 후에 깨달은 것이지만 이것은 과식이 아니라 고산증세다. 이상하게도 쿠스코나 마추픽추에서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라파스에 오니 더 괴롭다. 하긴 라파스가 더 높은 지역이긴 하다. 해발 3,800미터 즈음에 한 나라의 수도가 있다니... 세계에서 공기가 가장 희박한 대도시라는 말이 허언이 아닌 것을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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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도심보다 택시들이 힘겹게 오르는 언덕길 위의 골목이 더 정겨운 도시, 걸을 땐 조금 숨도 차고 머리도 콕콕 쑤시지만 마음은 편안한 곳, 인디오 원주민이 현재 대통령인 나라의 수도,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가도 축구경기를 보고 있는 곳. 오늘 하루 라파스의 인상은 그랬다.


'우유니 사막'에서의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들른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는 의외로 마음을 끌어당긴다. 아침에 만난 아주머니들의 조언을 듣지 못하고 아이패드를 들고 다니다 소매치기라도 당했다면 이런 감상은 연기처럼 사라졌을까? 하루 종일 라파스를 여행하는 마음이 훈훈했던 것은 그 아주머니들의 선한 눈빛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디서나 첫인상은 강렬하게 남는 법이지만, 유난히 마음이 끌리는 도시가 바로 라파스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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