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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비아 킴 Dec 04. 2019

더 이상 좋은 사람이 되지 않기로 했다

난 누구에게 좋은 사람이어야 할까?



모두가 사랑해 주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애쓰며 살아오던 어느 날,

난 더 이상 좋은 사람이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 에너지 원동력인 사람은 마음이 밑 빠진 독 같다. 


 끊임없는 갈증에 시달리는 것처럼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인정에 목말라 있다. 스스로의 인정보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하고, 대해 주냐에 따라 기분이 좋아졌다가 나빠지기도 하고, 의욕이 생겼다가도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무리해서 타인에게 온전히 맞춰주는 착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거나,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하려 하거나, 무리하게 스스로의 과업을 만들고 달성하려 한다. 좋은 결실을 맺는 것이 중요한 가치이다 보니, 과정이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딘다. 기대에 걸맞은 결과가 나와서 칭찬을 받으면, "고마워." 보다는 "별 거 아니야."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가 겸손한 태도를 미덕으로 삼는다지만 자신의 노고를 스스로 칭찬하기보다는 온전히 타인의 인정에 기댄다. 기대만큼 타인의 인정이 채워지지 않으면 금방 자괴감에 빠진다.



 물론 이런 점들이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데는 큰 원동력이 된다. 과업을 잘 달성하고, 꾸준히 자기 계발을 할 수 있게 해 주고, 사람들을 돕고 헌신한다. 하지만 타인에 의해 자신의 기분이나 결정이 좌지우지되다 보니 온전히 '내 선택, 내 몫, 내 삶'이 아니라고 느끼는 점에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양날의 검이다.



 신기하게도 이런 유형에 속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정의 과욕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쉽게 바꾸지도 못한다. 자신을 인정하는 것에 익숙하지도 않을뿐더러 시선의 모든 중심이 내부가 아닌 밖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말마따나 안다고 해서 쉽게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는 그저 모르는 자와 알지만 안 되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내가 그랬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추측하기로는 난 첫 아이였고 가족과 친지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선생님 말을 잘 듣는 얌전한 아이는 착한 아이라는 말을 듣고 난 후에는 그렇게 되기 위해서 더 애를 썼다.(당번을 자처하거나 심부름을 한다던지) 사람들은 나에게 좋은 말들을 많이 했고, 칭찬도 많이 해줬다. 처음에는 그것이 좋아서, 나중에는 의무가 되고, 이후에는 생존이 됐다.


 '잘난 나'여야 했기 때문에 상황이 뒷받침되지 않거나 역량의 한계에 부딪힐 땐, 열등감과 수치심에 병적으로 시달렸다. 특히나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더욱 심해졌다. 개개인으로서의 존중보다는 결과물로 인정받았다. 내가 가진 열등감과 수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인정이 필요했고, 그럴싸한 포장지가 필요했다. 그 안에 내용물이 어떤 모습이었든 간에.  



 실제로 난 가진 것도 없고, 뛰어난 재능도 없고, 근성이나 끈기도 부족했다. 하지만 그럴싸한 것들로 나를 포장해 오면서 내가 정말 능력 있고, 뛰어난 사람이라고 착각해 왔다. 내가 상상하는 '완벽한 나'를 만들고 그 역할에 과몰입해서 나중엔 내가 누군지도 모를 만큼 정체성도 상실했다.



 매일매일이 불안했고,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나를 무시한 사람들에게 내가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모두가 좋아하는 내가 되길 위해서, 인정받을 수 있는 성과물을 만들기 위해 날을 세웠다.


 그렇게 달려오다 보니, 나는 어느새 사람들에게 열정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넌 항상 열심히 하니까' '대단해, 어떻게 그런 걸 다 해?' '열심히 자기 계발하다니 멋지다'라는 말에 바닥 쳤던 자존감이 올라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언제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주말에도 쉬지 못했다. 집에서 누워 시간을 보내는 잉여로운 사람으로 낙인찍히면 모두가 나를 싫어할 것 같았다.


 좋아하던 책을 읽는 것도, 그림을 감상하는 것도, 배움을 청하는 것도 내세우기 위한 '일'이 됐다. 그런 것들을 많이 이루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고, 존경하고, 사랑해 줄 거라 믿었다. 실제로 이 전의 나는 사람들과 섞이지 못했지만, 포장지로 둘러싼 이후에는 내 주변에도 사람들이 머물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더 이 길이 살아가기 위한 좋은 방법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걸지도 모른다.  


 몇 개의 과업이 끝나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번아웃에 시달렸다. 심리상담을 몇 차례 방문하면서 내가 어떤 현상을 겪는지는 알아냈지만 원인은 여전히 찾지 못하겠다. 단지 여전히 내가 남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아이러니 한 건 내가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는 대상은 가까운 친구나 가족이 아닌 회사나 외부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애쓰면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가족과 친구들에게 풀며 히스테릭하게 굴었다. 한마디로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최고로 나쁜 사람이었을 거다. (실제로 가족들도 그때를 회고하면서 내게 한 마디씩 하곤 한다)


 나를 싫어하거나 내게 강하게 피드백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나를 좋아할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방법을 갈구하고 스스로를 몰아세우면서 괴로워했다. 그러다 너무 지치면 사람들하고 관계를 또 단절시키고, 에너지가 부족하면 또 나를 인정해줄 만한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만한 사람을 만났다. 20대 후반에 같은 부서에서 일한 선배였다. 막 부서 배치를 받은 나는 작고 초라했으며, 떨고 있었고, 실제로 한 명의 텃세로 매우 힘들어했다. 그런 내게 참으로 친절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했고 잘 따랐으며, 나를 잘 위해준다고 생각해서 그녀가 좋아해 줄 만한 일들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나를 칭찬해주고 치켜세워 줬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먹잇감이었다. 내게 필요한 만큼의 인정과 격려를 해 주면 나는 그녀가 원하는 성과물을 밤을 새워서라도 만들어 냈다. 내가 자라는 모습이 보이면 그 이상 자라지 못하고 몸을 움츠리게 공포감을 조성했다. 나도 나름 의심을 했다. 혹시나 그녀가 나를 도구처럼 쓰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나는 그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목을 매었다. 그녀가 나를 싫어하면 마치 모든 업무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두려웠기 때문이다. 매일이 불안하고 고통스럽고, 그녀를 만나는 게 고역이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해 주는 인정이 떠나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들을 발견하면서 내가 애쓰고 있는 관계와 인정에 대해서 재고하게 됐다. 지금 생각해도 그 시간이 무척 괴롭고 분하기도 하지만 덕분에 좋은 깨달음의 계기를 준 것에는 감사한다.



 내가 그렇게 애를 써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를 괴롭히고 싫어하는 사람에게까지 왜 난 좋은 사람이고자 했나. 그런 사람들에게 인정을 바라며 내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난 어떻게 했나.


 학교 후배들에게는 여러 번 밥을 사면서 함께 사는 여동생이 밥을 먹는지 마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고, 줄곧 내 곁을 지켜온 작은 고양이를 홀로 내버려 뒀고, 엄마 아빠에겐 찾아가지도 않았다.  정신을 차리니 여동생의 상처는 너무 깊었고, 작았던 고양이는 어느덧 13살이 되어 얼마나 더 이 친구와 함께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고, 부모님의 손등은 너무 주름져 버렸다.

 

이젠 주름으로 가득한 우리 아빠 손


난 여태 뭘 보고 쫓아온 것인가. 내가 빛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반짝반짝 빛내는 것뿐이었는데. 그것이 진짜 내 에너지였는데.


 난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그걸 깨달았던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후회와 미안함이 밀려왔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 내 행동으로 인해서 상처 받은 소중한 사람들, 내게 남은 시간 중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어떻게 감히 계산하고 셀 수 있을까. 가슴이 먹먹하다.


 아무리 애쓰고 발버둥 쳐도 난 내가 원하는 완벽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놓지 못했다. 중요한 것을 바라보지 않았다. 타인에게 사랑받는다는 희열만을 쫓아다니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지 못했고 스스로도 사랑하지 못했다.


 나를 사랑해주던 그들에게 좀 더 귀를 기울여서 그들이 해 주는 응원과 격려를 믿으며, 내가 나 자신에게도 '잘했어, 열심히 살아왔어, 잘하고 있잖아, 대단해!'라는 말들을 자주 했더라면 더 행복했을 텐데.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은 지 3년이 지났다.

 일과 삶에 밸런스를 맞추고,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보다 고양이 곁에서 차를 마시고, 가족과 여행을 가기 위한 계획을 짠다. 남자 친구에게 더 따뜻한 말을 많이 하려고 하고, 사람들에게 엽서를 쓰고, 가족들에게 자주 안부를 묻는다. 동시에 일회성인 비즈니스 관계나 불편한 관계에는 에너지를 덜 쓴다. (덜 쓰는 것뿐이지 못됐게 하는 건 아니다)



 이런 깨달음 속에서도 난 여전히 타인의 인정에 일희일비하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그들의 사랑을 느끼며 어떤 인정도 필요 없는, 행복에 충만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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