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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비아 킴 Oct 29. 2019

관계가 아픈 사람

모든 게 다 내 탓은 아니었다

 트러블 메이커, 일 밖에 모르는 사람, 냉정하고 날카로운 사람, 정이 없는 사람,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도 않고 쉽게 믿지도 않는 사람.

 

 어느 날 내 메일로 도착한 동료들의 다면평가 피드백이었다.


 마음이 아팠다.

 관계가, 사람이 아팠다.







 타고나길 내성적인 성격 때문일까.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과 잘 어울리거나 섞이지를 못했다. 내게 잘 다가오지도 않았지만, 나도 선뜻 다가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즐겁게 노는 것은 좋아하지만 금방 소진된다. 책을 읽거나 단짝 친구와 대화를 나누거나, 혼자 어딘가를 갈 때 적적해하면서도 안정감을 느끼곤 한다.


 회사에서도 일상에서도 사람들과 잘 만나질 않는다. 모두 함께 즐거운 것이 좋지만, 함께 있으면 금방 트러블이 생기고 마음이 틀어지면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친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버킷리스트’를 달성하는 것, 업무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서 인정받는 것, 부와 명예를 함께 가지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렇게 앞으로 달려왔지만 어느 날 관계의 부재를 크게 느끼게 됐다.


 나를 힘들게 하던 선배, 매일 같이 만나야 하는 60명이 넘는 신입사원들, 경쟁 상대인 직장 동료들, 의지할 수 없는 가족들 속에서 ‘인간 알레르기’ 마냥 대인기피증이 생겼다.


 동시에 사람들도 나로 인해 힘들어했다. 위에 언급된 수식어들이 동료들 사이에 떠돌며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 갔다. 아마도 일은 확실하게 처리하지만 실수는 용납 못하고 강하게 피드백하고 몰아붙이며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서늘한 모습에 질렸을 수도 있겠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나도 심적으로 괴로웠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나로 인해서 타인이 힘들어했고, 나를 비난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이 준 다면평가 피드백을 냉장고에 붙여 놓고 분해하면서도 고치려고 애썼다. 몇 달의 심리 치료도 받고 퀀텀, MBTI, DiSC, 이니셔티브, 코칭 등을 통해서 관계를 개선하려고 애를 썼다. 물론 타인을 위해서 라기보다는 내가 불편한 상황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할수록, 성찰을 할수록 내가 느낀 건 모든 잘못이 나의 성격과 성향 탓에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내가 의도 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내 태도로 사람들은 상처 받으니 서둘러 관계에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잘 안됐다. 관계의 골은 여기저기에서 생겨났고, 나는 그럴 때마다 나는 남자 친구에게 울면서 호소했다.



 관계가 나는 너무 아파,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


 그래.

 나는 관계가 힘들다기보다 아프다. 가슴을 칼로 베이는 고통과 통증이 밀려와서 온 몸이 쓰려온다.



 최근 심리 상담을 하며 관계의 아픔을 개선하고 싶다는 부탁을 드렸다. 어째 몇 번이나 찾아오지만 통 호전되질 않는다는 말과 함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힘들었거나 좋았던 것들을 번갈아가며 서술하는 질문지를 숙제로 받았는데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 가며 몇 번이고 울컥하는 마음을 억눌렀다. 설문지를 놓고 심리 상담 실장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들이 하나로 연결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확신할 순 없지만 내가 왜 사람을 믿지 못하는지, 관계가 왜 내게 통증이고 아픔인지.

 




아펠레스의 중상모략<보티첼리> 내겐 관계가 이런 그림같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맺은 또래들과의 관계는 폭력이었다.


네 살 때까지는 외딴곳에 살아서 또래를 만난 기억이 없다. 중고등학생이었던 이모, 삼촌이 종종 놀아주곤 했으며 그들은 나를 매우 예뻐하고 살갑게 대해주었다.


그러나 이사 간 동네에서 처음 본 동년배 친구들과 한두 살 많은 언니 오빠들에게 나는 머리를 세게 맞았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여전히 생생하다. 이 동네에 이사 온 나는 침입자이므로 맞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통증들이 온몸에 전해졌고 나는 매우 무서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에서는 피가 흘렀다. 너무 놀라서 한참 뒤 집에 가서야 울었는데 엄마는 되려 맞고 왔다고 화를 내셨다. 속상한 마음에 그러셨겠지만 나는 엄마가 화를 내는 것도 무서웠고 더 이상 맞는 걸 말하지 않았다.

 이후 일 년을 괴롭힘에 시달리며 맞고 다녔는데 안경이 부서질 때까지 맞는 건 고사였다. 골목마다 그 무리들과 마주칠까 무서워 숨어 다녔고 차라리 집에서 책을 보는 것이 또래와 노는 것보다 좋았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5학년까지는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왕따에 시달렸는데 당시 왕따를 시키던 여자아이는 덩치도 크고 주변에 친한 몇 명을 항상 데리고 다녔다. 일주일 또는 이주일 간격으로 여자애들을 한 명씩 골라 왕따를 시켰는데 나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 이기도 했다. 옷이나 신발이 사라지는 건 고사였고, 가방셔틀부터 빵셔틀, 친구들 사이에서 고립되어 있어야 했다. 가장 믿었던 친구들도 언제 나를 괴롭히는 적으로 돌아설지 알 수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가세가 기울고 부모님은 매일같이 싸우기 시작했다. 집이 싫어 도서관에 늦은 시간까지 있다가 늦게 귀가하거나 옥상에서 모두가 잘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동시에 나는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음울해졌고, 공부도 포기했다. 성적은 뒤에서 두 번째였다. 살도 쪄서 외모 자신감도 사라졌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일도 빈번했고, 친구들의 시선이 이전과 다르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나를 피한다는 걸 느꼈다. 진심으로 믿었던 친한 친구는 돌아섰고 결국 나는 소외된 사람 중 하나가 됐다. 내가 속할 곳은 없었고, 고2 담임은 내 형편을 들먹이며 자퇴를 강요했다. 학교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가고 싶지 않아 핑계를 대며 수업을 빼먹거나 야자를 빼먹었다.


 가족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던 날, 맏이의 책임과 가장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 생각했다. 책임감이 부족했고, 동생들에겐 깊은 죄의식이 느껴졌으며 부모님을 원망하면서도 내 탓이라는 절망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나와 고양이, 천장만이 남은 허름한 집에서 한참을 울었다.


 

 회사에서도 선배들에게 피드백받지 않기 위해 매일 긴장했다. 회사 조직이 이동되며, 낙오자가 되고 미움을 받을까 전전긍긍했다. 피드백을 받은 날은 다음날까지 잠을 이루질 못했다.

 일을 시킬 때만 친절하고 실적을 가로챈 선배는 나는 선배의 도구라는 피해망상에 시달리게 된 트라우마로 남았다.



 피드백을 피하기 위해 일하며 업무 스타일이 철두철미 해졌다. 사소한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 힘든 사수 밑에서 일하며 동료들과는 의지하고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도착한 다면평가에는 나의 사회성에 대한 강한 피드백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배신감과 상처에 며칠을 소리 내어 울었다. 그리고 냉장고에 코멘트를 붙여 놨다. 저런 내 모습을 바꾸고 말겠다 생각하고 가슴에 동료들의 피드백을 새겼다.



 시간이 흐른 후 온순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칭찬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나로 인해 힘들어하는 후배를 볼 때마다 가슴에 괴로움이 차올랐다. 동료들의 피드백이 떠올라 자꾸 나를 억눌렀다. 화를 내지 않는 게 미덕이라 여기며 마치 인자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연기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지적을 받았다. 관계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못하면 인생의 낙오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내가 가장 크게 느낀 건 단절의 아픔, 배신, 고통이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제든 내게 아픈 것을 안겨줄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더욱 나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믿어서도 믿을 수도 없게 됐다. 그러지 않고서는 내가 온전히 살아남을 수 없었다.


 모든 게 치열한 생존이었다.


 


 



 그래, 물론 이 속에서 좋은 추억이 없거나 고마운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 어떤 모습이든 나를 떠나지 않은 고마운 친구도 있고,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 만난 친구들, 지지해주는 동료들,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도 있다.


 또한 나를 떠난 그들을 크게 원망하지도 않는다. (악의적으로 괴롭힌 이들은 아니다.) 나를 떠날 만큼 내가 질릴만한 행동을 했거나, 나의 언행들 중 그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을 거다.


 그냥, 난 단지.

 여태 다 내가 잘못돼서, 내가 글러먹었기 때문에, 내가 노력이 부족해서, 나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의심해 오며 내가 문제 투성이인 사람이라 관계가 순탄치 않다고 여겨왔지만 ㅡ 이런 기억들을 상기시켜보며 온전히 나의 잘못만은 아니었다는 걸 느꼈다.


 나는 조금 안심했고, 나 자신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울었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

아직 덜 성숙한 내가 나름대로 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며 여기까지 왔다.


여전히 나는 관계가 아프고 무섭고 두렵고 의심스럽지만, 용기 내어 한 발씩 내디뎌 볼 것이다.


쉽지 않기에 가치로운 일이라는

현명한 어느 분의 말씀처럼

나의 아픈 관계 또한 그러할 것이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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